記錄

시 모음집 165

카테고리 설명
좋아하는 시를 올립니다.
  • 불가능한 숲 계간 문학동네 2015년 겨울호 수록, 박지혜 著 내가 죽으면 바람이 되어줄게. 바람이 불면 나를 생각해. 바람이 불면 내가 온 거야. 그녀가 말했다. 그럼 나는 숲이 되어줄게. 네가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숲이 되어줄게. 그가 말했다. 바람 부는 숲에 있었다. 오늘은 시장에 가서 파프리카 시금치 밤 굴 라즈베리 유칼립투스 천일홍을 샀다. 어쩌면 시장에 가지 않고 숲을 걸었던 것 같다. 할 말이 없는 자의 슬픔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쓸모없고 아름다운 것들의 슬픔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다짐은 끝없이 자라나는 머리칼 같고 가본 적 없는 곳에 내리는 폭설 같다. 다짐을 할 때마다 자라나고 녹아내릴 미래처럼 허망해졌지만 혼자 다짐을 하는 일은 끝이 없었다. 대신 혼자 하는 다짐은 어딘가 가여..

  • 수국 파랑의 파란 수록, 이강하 著 다시 핀 꽃이 화사하게 보이는 날이면 나비는 극도로 흥분을 한다 그 감정은 물의 발아 무아지경인 음악처럼 첫사랑의 음률처럼 또각또각 검정구두 신고 빙글빙글 돈다 태풍에서 살아남은 꽃잎은 강하다 그때의 사랑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너무 가난해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새가 지저귈 때마다 다른 각도로 물의 일부가 된다 사건과 소문이 난무하는 시대 태양의 둘레는 과연 그대로일까 문제가 된 구름들은 지금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물의 기억이 생생하기를 어떤 순간엔 확, 내던지고 싶은 황당한 말들이 자꾸 차오른다 구석구석 펴지면서 쿨렁거리는 태양의 골짜기로 나의 미래가 올라가고 나의 미래는 내려가고 잊고 있었던 이름들이 피어나고 이해할 수 없는 나라는 계속 돌아가고

  • 헤라클레스의 돌 2016년 가을호 수록, 정다연 著 살색을 뒤집어쓴 아이야, 보호색을 갖지 못한 아이야 네 작은 두 손으로 무얼 할 수 있겠니? 네가 묘목을 심기 위해 잡초를 뽑으면 잡초는 다시 자라 언덕을 뒤덮을 것이고 네가 목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패면 나무는 꿈쩍도 않고 더욱더 푸르게 물들 텐데 공중의 날개도 가벼운 뼈도 되지 못하는 아이야 네가 멍투성이의 손으로 모래밭에 이름을 쓰면 파도는 그 이름을 잊을 것이고 물결은 묵묵부답, 네가 무심코 벗어버린 신을 돌려주지 않을 텐데 한 손에 돌을 쥔 아이야, 넌 그것으로 무얼 할 수 있니? 네 돌은 부드러운 빵이 되지 못하고 네가 심장에 내리친 그 돌은 불씨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철근은 견고한데 먼지의 돌을 쥔 아이야, 반딧불이의 빛도 되지 못하는 아..

  • 자매 2016년 가을호 수록, 정다연 著 내가 너의 언니가 되어줄게 동생이 되어줄게 사각형의 창문 앞에서 네가 과일을 썰 때, 석류의 배를 가를 때, 꺼내 먹은 열매가 피 울음처럼 느껴질 때 손목을 타고 과육이 흐를 때 손에 든 식칼이 무겁다고 느낄 때 네가 서 있는 풍경이 살육의 한복판이라고 느낄 때 괜찮아 내가 너의 언니가 되어줄게 동생이 되어줄게 푸른 집의 욕조 그 안에서 네가 물을 틀 때 네가 아닌 다른 누구도 수도꼭지를 잠가주지 않을 때 깨진 타일, 더러워진 얼룩이 벽을 타고 번져나갈 때 네가 욕조에 누워 조용히 금 갈 때, 숨을 참고 머리를 담글 때 만져지는 네가 투명한 잡초처럼 느껴질 때 내가 너의 언니가 되어줄게 동생이 되어줄게 거미줄이 쳐진 다락방, 이불보를 덮고 네가 호흡할 때 머리맡에..

  • 제3병동 신해욱 著 당신은 하얀 사람. 입술도 하얗고 발자국도 하얗군요. 아주 사뿐히 걸어가도 복도와 계단은 당신에게 물들어요. 맑은 국수를 당신은 즐겨 먹기도 하는데요. 이름이 뭐예요. 정말로 당신은 하얗군요. 밀랍과 석고를 섞어 커다란 날개를 만들어 드릴까요. 이불이 펄럭이네요. 나의 이마를 만져주세요. 당신의 손에만 닿으면 이름도 색깔도 전부 가라앉죠. 가볍게 나를 덮고 당신은 더욱 더 하얀 사람. 나는 이미 눈이 멀었어요. 당신만 이렇게 보이는군요

  • 2월은 홀로 걷는 달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수록, 천양희 著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 기척도 없이 오는 눈발을 빛인 듯 받으며 소리없이 걸었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어 말없이 걸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 그래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중얼거리며 걸었다 열리면 닫기 어려운 것이 고생문(苦生門)이란 걸 모르고 산 어미같이 걸었다 사람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란 말 생각나 지나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걸었다 불가능한 것 기대한 게 잘못이었나 후회하다 서쪽을 오래 바라보며 걸었다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말 곱씹으며 걸었다 나의 진짜 주소는 집이 아니라 길인가? 길에게 물으며 홀로 걸었다

  • 학살의 일부 11 극에 달하다 수록, 김소연 著 나는 그때 그 핏빛을 사색했다 지는 해 지는 해 거기에서 나는 청춘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청춘으로 살아야 한다고 애쓰는 너희를 보았다 그런 너희가 지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황혼의 힘으로 모서리를 날카롭게 빛내는 이곳에서 나는 외롭다,라는 말을 천천히 발음해본다 외로움이 부족해 피가 마르는 세상이 있고 중무장된 평화에 천천히 질식되는 너희가 있고 지금은 마지막 사랑, 더 이상 꿈꿀 사랑이 없다, 라는 사실을 날마다 애써 외우는 내가 있다 삶이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돌아앉아 추억에게 먹이를 준다 돌아누워 내 추억을 먹이로 받아먹다 잠든 세상이여, 바람소리 굉장해서 나는 사나운 꿈들을 불러들였노라 지금 찬란하게 지는 해의 저 사무..

  • 학살의 일부 9 극에 달하다 수록, 김소연 著 -그렇게 차가운, 차가운 땅에 누워 멀리 흐르는 하얀 구름들만 바라보고 있는지 1 살아온 날들이 남긴 너의 사물들 정리하다 새벽을 맞았다 간밤의 거친 비에 못 견딘 꽃나무들은 손톱같이 애지중지하던 꽃잎들을 다 버렸다 골목에 떨어져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꽃들의 마지막 육체를 내가 먼저 보고 있다 2 살아서 고기를 굽고 파란 상추에 싸 먹는 내가 있고, 음식보다는 너로 인한 추억들에 날마다 체하고 손끝을 따는 나 또한 있다 3 (너를 잃은 후, 나는 산 자들의 안부는 정말이지, 하나도 궁금하지가 않다. 살아 있는 내가 끊임없이 이 육체에 무릎꿇듯, 행여 네가 그 넝마 같던 육체마저 애달프게, 그리워하고 있으면 어떡하나, 내 걱정은 그게 먼저다. 오늘 적조암이란..

  • 학살의 일부 8 극에 달하다 수록, 김소연 著 너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은 나를 죄짓게 한다 지은 죄가 지을 죄를 책망한다 저주를 받아서, 입안 가득 질긴 거미줄을 물고 있는 나로서는 정갈한 이 낯선 마음이 지나치게 부끄럽다 살아서 못다 한 선행을 지시하는 듯한 너의 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만 포박당한다 밥을 먹는 너를 보았다 나는 살찐 김치를 씹을 때처럼 상큼한 생각을 해냈다 더 큰 죄를 지으리라 더 크게 칼을 휘두르리라 더욱더 더럽혀지리라 유례없는 벌을 받으리라 벌건 빛을 뿜어내는 전기 난로, 손을 쬐고 있는 너의 등을 더 이상 연연하지 않으려면 나는 혼자서라도 갈 때까지 가야 한다 그곳이 까마득해서, 천사인 듯 싶은 너의 그 날개가 뚝뚝 분질러지는 소리 들리지 않아야 한다

  •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 김이듬 著 이건 내가 쓴 시가 아니에요 대충 만년필로 휘갈긴 것도 있고 침 묻힌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빨간 밑줄을 그은 것도 있네요 나는 안경을 쓰고 세심하게 윤문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 때문에 제멋대로 몇 자 넣을 때도 있어요 간혹 자기소개서 대행업체 직원같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을 때도 있답니다 이 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난 혼자 피크닉 떠났어요 바위에서 물이 쏟아지고 죽은 새의 깃털이 펄럭일 때 숲 속의 가지 끝에서 누군가 웁니다 리본을 풀고 붉은 책을 펼칩니다 나는 당신을 만집니다 뺨의 체온 머리칼의 감촉 나는 당신을 다 꺼내놓을 수 없습니다 시럽에 빠트린 크랙커를 건지듯 따듯한 물속의 쿠키를 꺼내듯 단지 나는 당신을 가지고 만든 책을 봅니다 당신은 키스로 봉한..

  • 그래서 김소연 著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 아이에게 안미옥 著 모았던 손을 풀었다 이제는 기도하지 않는다 화병이 굳어 있다 예쁜 꽃은 꽂아두지 않는다 멈춰 있는 상태가 오래 지속될 때의 마음을 조금 알고 있다 맞물리지 않는 유리병과 뚜껑을 두 손에 쥐고서 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너의 등을 두드리면서 부서진다 밤은 희미하게 새의 얼굴을 하고 앉아 창 안을 보고 있다 노래하듯 말하면 더듬지 않을 수 있다 안이 더 밝아 보인다 자주 꾸는 악몽은 어제 있었던 일 같고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물에 번지는 이름 살아 있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