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집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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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연습 계간 동서문학 2018년 가을호 수록, 서안나 著 눈을 감으면 한 사람의 영혼과도 마주치지 않으며 내 안에 진흙 뼈와 진흙 감정이 고여 있지 않으며 진흙은 사람을 쉽게 버리며 진흙은 찰지고 고요하고 아름답지 않으며 비를 맞으면 젖지 않으며 내 몸에서 무너진 풍경이 다시 무너지지 않으며 나는 진흙 입술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로 노래하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은 배반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은 뒤돌아서는 인간을 만들지 않으며 진흙의 두 손을 버리지 앟았으며 진흙 피가 쏟아지지 않았으며 진흙 심장이 금이 가지 않았으며 내 눈에서 짐승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며 진흙 입술은 칼로 손목을 그은 자처럼 두 팔의 영혼이 되지 않으며 사막이 지나가지 않고 불타는 밤이 만져지지 않고 진흙이 진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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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김명원 著 그가 평생 가꾼 황무지를 알고 있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보다 황량하고 자신이 죽을 세상보다 몇 배나 황막한 넓디넓은 정적으로 견뎌온 땅 가끔은 그가 벼랑 톱 바위에서 초승달이 뜨길 기다려 무른 정신을 달빛에다 예리한 뿔로 갈았다거나 독한 냉기가 광기로 변하는 겨울바람 속에서 제 목을 치는 노래로 밤의 끝까지 가 닿아 슬펐다거나 그리움의 바깥쪽을 닳도록 매만지다 병이 깊었다는 소문들만 붉은 모래 갈기에 점점이 묻혔을 뿐 버려진 허공들을 주워 모아 사람들은 수거를 하고 끝내 잊히지 않을 몇 개 추억들이 삽화로 그려진 밀서의 파본을 폐기하다가 그의 행방을 두려워하며 철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목도할 때 오래 어두워 세운 그 황무지를 찾고 찾았던 나는 고독이 삼켜버린 그의 몸에 다녀온 꿈을 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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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김은상 著 그랬을지도 몰라. 아이들이 죽으면 모두가 고양이로 태어나 그리움을 서성이다 가는 것인지도. 갓 태어난 아이들의 심장이 너무 가벼워서 자정의 별빛들이 저리도 서럽고 무겁게 반짝이는 것인지도. 함부로 무너질 수 없는 다정이 함박눈의 고요로 피어나 봄꽃의 노래로 흩날리는 것인지도 몰라. 세상이 재촉한 슬픔의 형식이 털의 무늬일지도. 그래서 뱉어낼 수 없는 손길의 온기가 혀의 돌기로 흐르는 것인지도. 매일매일 그대의 지붕을 뛰어놀고 싶지만 놓고 싶지 않은 꿈을 놓아야 해서 가끔은 발톱의 날카로움을 잃어버리는 것인지도. 때 이른 이별이 싫어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는 찰나를 뒤척이는지도. 아이들은 폭풍의 언덕에서 태어나 근심뿐인데 어른들은 미처, 화창한 봄날의 소풍만을 그리는 것인지도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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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의 회유 현대시 2018년 5월호 수록, 조용미 著 당신과 함께 연두를 편애하고 해석하고 평정하고 회유하고 연민하는 봄이다 물에 비친 왕버들 새순의 연둣빛과 가지를 드리운 새초록의 찰나 당신은 연두의 반란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찬란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유혹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확장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경제라 하고 나는 연두의 해법이라 했다 여러 봄을 통과하며 내가 천천히 쓰다듬었던 서러운 빛들은 옅어지고 깊어지고 어른어른 흩어졌는데 내가 아는 연두의 습관 연두의 경계 연두의 찬란을 목도한 순간, 연두는 물이라는 목책을 둘렀다 저수지는 연두의 결계지였구나 당신과 함께 초록을 논하는 이 생이 당신과 나의 전생이 아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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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영역 당신의 아름다움 수록, 조용미 著 여긴 아주 환한 어둠이다 조금 다른 곳으로 가볼까 천천히, 휘익 명왕성 탐사선 뉴호라이즌스호처럼 나도 9년 6개월을 날아서 걸어서 그곳으로 갈 수 있다면 수차례의 동면 과정을 거쳐 자다 깨다 하며 어둠이라는 심연에 다다를 수 있다면 당신은 명왕성보다 멀어야 하지 조금 더 멀어야 하지 누구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훼손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영역에 별보다 죽은 자들이 더 많으면 곤란하다 빈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 어둠 속 저수지 근처 폐사지의 삼층석탑, 차창으로 얼핏 보았던 과일을 감싸고 있는 누런 종이들이 내뿜는 신비한 기운 이런 것들에 왜 잔혹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몸서리쳐야 하는지 슬픔이 왜 이토록 오래 나의 몸에 깃들어야 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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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집 얼룩의 탄생 수록, 김선재 著 이윽고 눈이 빛이 되는 밤이 되자 우리들은 빛나는 눈 속에서 눈을 감았다 야광충 같은 빛들이 눈동자 속을 떠다녔다 적조한 우리 집에 놀러 와 지금이 아닌 어딘가 자라지 않는 낙서가 지키는 그 집으로 놀러 가 이제 풀들이 자라고 풀들만 자라고 수풀을 헤치면 수심을 알 수 없는 표정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지금은 해빙의 계절 녹은 당신은 침묵이 되고 죽은 당신은 죄가 되었다 잘못했어요 나는 평생 이 말을 하기 위해 애쓰면서 누구도 이 말을 듣지 않길 바랐죠 끝없이 끝말을 이어가요 멍 같은 석양이 번지는 저녁 붉은 햇살을 문질러 닦으며 끝없는 끝말에 골몰하지요 주문처럼 이어가지요 잘못못질질주주홍홍채, 어둠의 채도, 도대체 무엇이 잘못입니까 까닭 없는 질문만 남은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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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은 불온한 검은 피 수록, 허연 著 내가 앉은 2층 창으로 지하철 공사 5-24 공구 건설 현장이 보였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몰인격한 내가 몰인격한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당신을 테두리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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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불온한 검은 피 수록, 허연 著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