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錄

시 모음집 165

카테고리 설명
좋아하는 시를 올립니다.
  • 오늘의 일기 중독 수록, 김박은경 著 따귀를 한 대 갈기다 보면 안고 싶고 이제 그만 안녕, 하다 보면 어머 안녕, 하고 싶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다 보면 어쩌다 그럴 수도 있을 거 같고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들을 대려면 셀 수 없이 많은 핑계들이 생겨나고 진실처럼 보이는 진실과 진실인 진실, 고통처럼 보이는 고통과 고통인 고통, 죽고 싶다 말하지만 정말로 죽고 싶지는 않고 살고 싶다 말하지만 정말로 살았던 적 없고, 죽고 싶은데 누가 자꾸 살려놓는 거니 살고 싶은데 왜 목을 조르는 거야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아니,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거 맞잖아 고백은 뻔해서 아무도 안 믿는다 유서는 약발 떨어졌다 울고 소리쳐도 벽에 머리를 박아도 달라지지 않는다 높은 데서 떨어져도 괴물처럼 살아날 거다 그래..

  • 야간 주행 배수연 著 거대한 수사슴을 치었어요 입을 벌리면 잉크가 쏟아지는 밤이었고 내 영국산 지프 앞에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는 큰 뿔 사슴이 있었어요 나는 사슴이 넘을 수도 태울 수도 없어 어느새 한 시간째 경적만 울렸어요 사슴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해요 제발 그만,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거야 왜 내 앞으로 뛰어든 거야? 사슴의 터진 몸에서 나오는 빛나는 주홍 알갱이들 그건 껍질이 벗겨진 귤의 살처럼 쓰러진 채 물을 흘렸고 나는 뒷좌석에서 얼굴을 싸매고 밤을 새웠어요 고개를 숙일수록 차오르는 주홍 강물 이 밤이 지나면 우린 달리는 것과 흐르는 것들의 목적지에 닿을 거야 그곳에선 너와 나의 이름을 말하는 이도 부르는 이도 없겠지만 태양 아래에 서서..

  • 너무 오래 되었다 박서영 著 눈을 감고 손으로 읽어보라는데 심연으로 그곳에 닿아보라는데 나는 자꾸 처음의 그 약속을 잊어버린다 눈을 뜨고 만다 점자책을 읽지 못한다 혼신의 힘으로 날아가 흰 흙덩이를 밀어 올린 눈보라를 만져보지 못한다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보았는데 습관처럼 멀뚱멀뚱 눈동자가 열리고 만다 눈을 감고 바람소리를 들어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내 가슴에서 누군가 떠나가는 것을 눈을 감고 깊이 느껴본 적이 있는가 스쳐 가는 것의 목격자가 되어 오래 아파 본 적, 너무 오래 되었다

  • 아득한 한 뼘 권대웅 著 멀리서 당신이 보고 있는 달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달이 같으니 우리는 한 동네지요 이곳 속 저 꽃 은하수를 건너가는 달팽이처럼 달을 향해 내가 가고 당신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이 생 너머 저 생 아득한 한 뼘이지요 그리움은 오래되는 부푸는 것이어서 먼 기억일수록 더 환해지고 바라보는 만큼 더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는 것처럼 달 속에 달이 뜨고 또 떠서 우리는 몇 생을 돌다가 와 어느 봄밤 다시 만날까요

  • 호모 루아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록, 나희덕 著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는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

  • 오후와 나 이성미 著 오후와 함께 희미해졌어요 내가 조금씩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태양도 함께 다른 시간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도 함께 너를 희미하게 하려 했는데요 그러다가 오후 속으로 들어가 희미해졌어요 내가 너는 간절히 믿었겠죠 내가 없다고 나는 투명해졌어요 비로소 오후와 함께 의자에 얹힌 엉덩이와 의자가 의자의 다리와 나의 다리가 나의 얼굴과 그 옆이 뭉개집니다 너는 오후를 통과합니다 네가 오후 속에 앉아 있는 나를 통과합니다 나는 팔을 뻗어 너의 몸속 그늘진 내장에 손을 댑니다 너의 불투명한 몸이 더 투명하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네가 도시 끝을 향해 떠납니다 네가 멀어지면서 하얀 그물처럼 투명해질 때 물고기처럼 나는 천천히 오후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태양과 바람을 느끼는 불투명한 덩어리로 돌아왔습니다 네..

  • 하지의 노래 박지혜 著 그녀의 화단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아무도 없는 바다 위의 하얀 깃발을 그리며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하얘지며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그의 책들을 꺼내 읽으며 하염없는 문장 속에서 나오지 않으며 없는 사랑 없는 아름다움에 빠져 들어가며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하나의 감정에 하나의 감정에 하나의 감정이 비올라의 검은 지판 위에 아름다운 왼손이 말총으로 만들어진 활에 아름다운 오른손이 도솔레라 도솔레라 활털은 시베리아 말총이 좋아요 개방현 소리가 좋아 악보 없이 온종일 활을 그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는 어렵지요 운지법을 기록하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을 기록하고 감정에 실패하고 감정의 기록에 자주 실패하고 나는 점점 말하는 법을 잊어가고 이대로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

  • 마른 풀잎 노래로 가는 배 수록, 유경환 著 마른 풀잎 속엔 엽맥(葉脈)의 질긴 기도가 남아 있다. 끊기지 않던 가녀린 목숨 소리 하늘에 내뿜던 숨 멈춘 채 멈춘 그대로 버리지 못한 소망을 아름답게 날려 가며, 세우던 고개는 떨어뜨렸으나 짙푸름으로 적시던 기다림 당신의 뜻에 발돋움하자던 춤, 그 몸짓을 모르리라. 바람에 시달리고 짐승에 밟혔어도 어떻게 지금부터 시야에서 사라지는가를 하늘이 하얗게 흙을 덮어 내리면 알리라. 끝바람에 몸 부서져 바서지는 것도 온몸 소리내며 태우는 불꽃 와 주지 않아도 닿지 않아도 들판 가득히 일어서는 영혼과 그리고 어딘가에 묻혀 거름이 되는 것 봄으로 미루는 부활을 마른 풀잎 속엔 기억해야 할 기도가 남아 있음을 당신 한 분이라도 당신 한 분이라도.

  • 푸른 밤 박소란 著 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뒤집어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그만 다 이해한다

  • 체크 메이트 손미 著 어제는 있었는데 오늘은 없네. 라이터를 켤 때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을. 맨발로 도망가는 여자는 초식동물 눈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중이네. 나는 자주 죽었는데 컷, 눈 뜨면 이곳은 총구 속 힘을 풀고 발사되는 순간, 어제인지 오늘인지 하루가 사라지네. 바라보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람인 채 외투에 팔을 넣다가 막 부화하는 알로 변하기도 했지. 컷, 이렇게 매일 나를 살해하는 건 누구인가? 컷, 눈을 뜨면 당나귀 새끼. 세 번 깜빡이기 전에 죽어 버리는 그리고 다시 컷. 함께였는데 지금은 사라진, 사라진 사람들

  • 한밤의 음표 조혜은 著 네가 죽었을 때, 나는 옅은 색 후회를 했지. 길어진 밤이 우리의 배를 관통했지. 우리의 불행을 상의하지 않고 통보했다는 이유로 너는 화를 냈고, 가족들은 우리가 만났다는 이유로 우리의 불행을 관조하다 조롱했지. 우리는 외롭고 희미한 길에서 끔찍한 적응을 하려고 만났지. 잊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게 힘들어서 잊히기 위해 노력하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 하지만 돌아가면 적응할 길이 없어.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분장을 해야 했지. 너무나 사랑해서 막다른 골목이 되었고, 찾을 길 없는 사진이 되었지. 찾아서 바라보다가 지금의 우리를 잊고, 내가 당신을 모르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는 뼛속부터 불친절했지. 하지만 나는 당신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서로를 증오하다 살이 녹아내..

  • 사과 시와 표현 2017년 12월호 수록, 서안나 著 감정은 입구가 좁고 가늘었다 과실주를 흔들면 나는 색이 흩어지는 사람 어둠 속에서 찬 손을 꺼내어 따르면 잠시 붉어진 얼굴이 다녀갔다 사과에서 사과를 빼앗고 빨강에서 빨강을 빼앗고 흙과 물로 물러가는 계절 사과는 쉽게 죽지 않는다 최초의 생각으로 돌아간다 어릴 적 욕조에서 숨을 참으면 아픈 얼굴이 보였다 사과처럼 붉었다 병 속엔 폭설의 들판이 가끔 잠긴다 낡은 외투를 걸치고 병든 들판을 다녀가는 사람 나는 당신의 고통에 얼마만큼 다가갈 수 있는지 입에 신맛이 고이던 검은 늪이 깊어지던 병과 함께 다정해지는 위악의 계절 와병의 계절 오늘 밤은 사과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