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집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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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독방 이혜미 著 나는 이제 막 절망하기를 마친 사람. 무엇의 중심도 되지 않으려 너의 손을 잡고 경쾌하게 돌고 돈다 흐린 장막이 펼쳐진다. 두렵지 않니? 서로 다른 몸이 하나의 시간에게 벌이는 일이. 두근대지 않니? 저 수많은 점들이 편재하며 사람에게 문양을 허락하는 일이. 그것들 별자리를 이룰 줄 알았는데. 잘못 그어준 선들이 서로를 깊이 추워한다. 나는 무엇이라도 붙잡고 흐르는 자, 문장이 아닌 척 노래 속으로 스며들면 너의 불신은 얼마든지 나의 양식이 된다. 이 음악이 끝나더라도 홀로 있는 한 너와 나는 완벽해진 한 쌍. 아름다운 그림자를 가지기 위해 서로를 배제하는 법을 익혔지. 그것을 너는 소용되지 않는 말들로 이루어진 행성이라 했지만, 나는 그 어둠에 손을 담근 채 떠나갈 수 있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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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사랑의 어두운 저편 수록, 남진우 著 그리하여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낡은 수첩 한 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 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나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 구석에 밀어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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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적 기형도 著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났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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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이름 작명소 이은규 著 고단한 잠은 멀리 있고 나를 찾지 못한 잠은 누구의 호흡으로 도착해 하룻밤을 보내고 있을까 나는 아직 아름다운 운율에 대한 정의를 잠든 그의 숨소리라고 기록한다 두 눈을 꼭 감으면 잠이 올 거야, 없는 그가 다독이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두 눈을 꼭 감으면 감을수록 떠도는 별들이 동공의 어두운 웅덩이를 찾아와 유성우(流星雨)로 내렸다 밤새 유성우로 내리는 별들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면 차가운 호흡과 별들이 돌아가는 시간이 꼭 알맞았다 오랫동안 성황을 이룰, 별 이름 작명소 잠을 설친 새벽이 눈뜰 때마다 검은 액자 속 한 사람과 마주쳤다 날마다 희미해지는 연습을 하는지 명도를 잃어가는 사진 한 장 별이 태어나는 차가운 먼지구름 속 아무도 그가 먼지구름에 도착했다는 안부를 전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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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박상순 著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 와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면 좋겠다 인공 딸기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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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녀 일기 김인육 著 오늘은 이 별에서 뛰어내리기 좋은 날이에요 앨버스트로의 눈부신 날개와 코스모스 속곳은 벗어두고 가요 내가 이 별을 떠난 흔적이죠 한 오백 광년쯤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그대 사는 별까지는 좀 외로운 여행이긴 하죠 난쟁이가 사는 초록행성과, 가시 장미들이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소행성 B29에서 잠시 쉬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물고기자리를 지날 땐 부풀어 오르는 태양풍 오로라를 조심해야 해요 자칫 우리의 기억이 휘리릭 머플러처럼 날아가 버릴 수가 있어요 그러면 난 만나도 그대를 알 수가 없죠 깜깜한 암흑처럼 원초적으로 슬프죠 와우 당신이 저만치서 보이네요, 양떼를 몰며 피리를 부는 당신 내가 떠나온 별자리가 갑자기 눈부시게 환해지기 시작했어요 당신을 만났으므로 내 별은 이제 막 초신성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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