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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음집 165

카테고리 설명
좋아하는 시를 올립니다.
  •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허수경 著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의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 맨드라미 정원 이승희 著 저녁이 오지 않는 날 있습니다 무엇과 무엇 사이에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있습니다 허공도 바닥도 아닌 곳에서 머리를 부딪혀 피 흘리는 날 있습니다 잠을 자도 되는지 이쯤이면 그만 죽어도 되는지 묻지 못하는 날 있습니다 날마다 자라나는 과거도 있습니다 내가 버려진 상자가 되는 것은 정말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무도 날 데리러 오지 않아도 장례식은 어디서든 시작되고 끝날 것입니다 나의 삶이란 한 줄로도 충분해서 누구든 나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맨드라미 정원에 살고 있습니다

  • 폭설 허연 著 말로 한 모든 것들은 죄악이 되고 죄악은 세월 사이로 들어가 화석이 된다는 걸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벼랑에서 마지막으로 웃고 있을 때, 나는 수백 개의 하얀 협곡 너머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웃음이 나의 이유였던 날. 이상하게도 소멸을 생각했습니다. 환희 속에서 생각하는 소멸. 체머리를 흔들었지만 소멸은 도망가지 않고 가까이 있었습니다. 원망하다 세월이 갔습니다. 이제야 묻고 싶습니다. 두렵지는 않았는지. 망해 버린 노래처럼 그렇게 죽어갔던 과거를 당신이 어떻게 견뎌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나는 오늘도 소멸만 생각합니다. 협곡을 지나온 당신의 마지막 웃음을 폭설 속에서 읽습니다. 왜 당신은 지옥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죽어서 다시 천 년을 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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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설_허연 NEW

    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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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 당신 허연 著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죄는 검은데 네 슬픔은 왜 그렇게 하얗지 드물다는 남녘 강설의 밤. 천천히 지나치는 창밖에 네가 서 있다 모든 게 흘러가는데 너는 이탈한 별처럼 서 있다 선명해지는 너를 지우지 못하고 교차로에 섰다 비상등은 부정맥처럼 깜빡이고 시간은 우리가 살아낸 모든 것들을 도적처럼 빼앗아 갔는데 너는 왜 자꾸만 폭설 내리는 창밖에 하얗게 서 있는지 너는 왜 하얗기만 한지 살아서 말해달라고? 이미 늦었지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재림한 자에게 바쳐졌다는 종탑에 불이 켜졌다 피할 수 없는 날들이여 아무 일 없는 새들이여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리려면 20년이 걸린다

  • 미열 작은 미래의 책 수록, 양안다 著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달이 뜨는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아무도 모르는 마음이 뒤따라오는데 사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던 위로는 각자의 각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우리들이 꾸려 했던 모든 꿈이 위악이라는 걸 알았을 때, 우리가 느낀 건 실망이 아닌 동경에 가까웠다 밤이 지나고 오는 건 새벽인데 사람들은 왜 아침이 온다고 하는 걸까 새벽이 만드는 소량의 빛과 소음 속에서 어느 취객은 유기견을 걷어차면서 걷고 있었다 그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욕을 뱉으며 죽어버리자 그냥 죽이고 죽어버리자, 중얼거렸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취한 채 다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느 날 불어난 강물 위로 달이 깨질 듯 일렁..

  • 주동자 김소연 著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여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 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아버린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눈물이라는 뼈 수록, 김소연 著 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습니다 너는 내 귀에다 대고 거짓말 좀 잘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듯 거짓말 덕분에 이 우주는 겨우 응석을 멈춥니다 어지럽습니다 체한 걸까요 손을 넣어 토하려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여긴 왜 이렇게 추..

  • 口 성동혁 著 당신이 날 재앙으로 인정한 날부터 언덕마다 달이 자라났네 슬리퍼는 낙엽을 모방하며 흩어지고 모이고 계절은 용서까지 치달았다 창세기를 여러 번 읽어도 나는 가위에 눌렸다 난간에 심은 바람에 대해 변명하지 못했다 신앙과 종말을 함께 배워 불안하진 않았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나오는 허밍은 나의 궤도이다 입을 닫아야 들리는 곡선 죄가 유연하고 둥그렇다 달이 찰 때마다 미안한 것들이 생긴다 죄를 앓고 난 뒤 쿨럭쿨럭 보라색으로 자란 바람이 살 나간 우산 안의 그림자를 밀쳐 내고 몸을 디밀며 안녕? 당신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종량제 봉투 안에 가득 찬 악몽을 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인사를 할 수 있도록 새벽 기도를 나가지 않고도 자라난 달을 버릴 수 있도록 동글네모스름한 초인종을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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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口_성동혁 NEW

    202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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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을 위한 헌시 정규화 著 바라보면 꽃이었고 돌아서면 그리움이었다 나는 왜 그 짓을 못했을까, 꺾어들면 시든 다음에도 나의 꽃인 것을

  • 무정한 신 정한아 著 이 사막은 흐른다 어제의 유희가 오늘은 비수다 석양에 물든 모래를 두 손 가득 담아들면 붉은 태양빛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모래알 밑에 새겨진 그대의 이름은 밟고 나는 지평선으로 간다 보라, 어둠이다 공평무사하신 어둠의 신이 저 멀리서 옷자락을 끌고 걸어오신다 내 두 눈을 지워주소서 창공의 별들을 탐하지 않도록 세상의 모든 빛이 나를 찌르나이다 그러나 신은 무정(無情)하므로 나의 기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래알처럼 그대의 이름은 무수히 빛났다 흐르는 사막에서는 별들도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눈꺼풀에 새겨진 그대의 이름을 깜빡이며 나는 지평선으로 간다 보라, 어둠이다 공평무사하신 무정한 어둠의 신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그분이 시간의 옷자락을 끌고 걸어오신다 발바닥이 까맣다

  • 가시를 위하여 김선재 著 통증을 용서해요 부분이면서 어느덧 전체가 된 나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이. 날을 세운 날은 아니지만 나이면서 당신이고, 당신이지만 나인 시간을 견뎌요 나는 기원에서 멀어졌다 이미 나는 숲의 변형이며 혹은 바다의 변종이다 형식에서 멀어져 속도 없고 겉도 없는 어떤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사라진 내용이지만, 여전히 전체를 제압한다 형식을 제압한다 나는 혀의 어순이다 돌기들 사이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하나의 돌기는 혀일까 바늘일까 미각은 우리의 옛 성질이었으나 지금 너는, 나는 혀인지 바늘인지, 짠맛인지 쓴맛인지 수시로 아픔을 확인하는 너인지 나인지 같은 온도를 갖기 이전에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러니 제 분을 못 이긴 팔매질을 용서해요 때로..

  • 물속 깊이 꽃들은 피어나고 강은진 著 나는 너의 말로 말을 하고 너의 얼굴로 잠든다 내일, 이라고 적힌 글자들을 삼키며 물속 깊이 꽃들은 피어나고 울지 않는 밤이 다시 찾아오다면 너의 흙 묻은 신발을 오래오래 껴안고 있을 거야 어린 감나무를 심어 놓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연하디연한 살갗에 뺨을 대며 붉은 열매들이 나비처럼 꿈꾸는 상상을 할 거야 나는 너의 손으로 꿀벌의 투명한 날개를 쓰다듬고 너의 생채기로 선혈을 흘린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고요 속에서 아마 나는 네가 붙잡았을 최후의 기억 그때 웃고 있었다고 믿을 거야 분명히 그랬다고 믿을 거야 봄은 바싹 마른 입술처럼 바스락거렸지만 살아있는 것들 중 침수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나는 가을에 태어났고 네가 없는 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