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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음집 165

카테고리 설명
좋아하는 시를 올립니다.
  • 다정함의 세계 김행숙 著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 안부 윤진화 著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세계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읊조립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 속에 가득한 혁명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당신에게 답장을 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 나도 당신처럼 시詩를 섬기며 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부끄럽지 않게 봄을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 목숨의 노래 문정희 著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 여름 박지혜 著 기억나지 않는다 얼어가는 사람을 끌어안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얼어가는 사람들은 아름다움만 보여주었다 예감에 휩싸였던 시간 정말 신비였을까 검은 길을 걷는다 단단하고 축축한 밤공기 텅 빈 그림자새 기억나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들이 되살아난다 무슨 계절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여름 죽음처럼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너와 나의 아름다움이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해도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 초원(草原) 신경림 著 지평선에 점으로 찍힌 것이 낙타인가 싶은데 꽤 시간이 가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토막인가 해서 집어든 말똥에서 마른풀 냄새가 난다. 짙푸른 하늘 저편에서 곤히 잠들었을 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초원이 두려워진다. 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

  • 밤 길 황인숙 著 달을 향해 걷는 발걸음 소리 목적도 축도 없이 밤이 빙글 도는 소리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는 소리 한숨 소리 나무가 호흡을 바꾸는 소리 담쟁이 잎사귀가 오그라드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에 성큼 담벼락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림자 소리 너무 지쳐서 꼼짝도 못하겠어 벤치에서 한 노인이 이 빠진 달의 찻잔을 어루만지는 소리 가로등이 파르르 떨리는 소리 아무 반항 없는 시간의 기침 소리 잠이 회유하는 소리 잠시 구름이 멈추는 소리 나는 네가 밤길을 걷는 것을 본다 네게서는 달의 냄새가 난다 너는 걷고, 걷고, 걷는다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 해괴한 달밤 김선우 著 딱- 딱- 따귀 때리는 소리 같은 것이 중천에서 때마침 기다린 손바닥 같은 구름이 달을 가리며 지나가는데 따악- 아이구 저거, 달이 따귀를 맞고 있는 거 아냐? 연거푸 달려온 구름들의 뭇매를? 토라진 구름 씩씩대는 구름 입술을 잘근 씹는 구름 저마다 자기 사연이 가장 애달프다는 듯 명랑하게도 왜 네 빛은 나만 비추지 않는 거야 왜 나만 사랑하지 않는 거야 왜 외간 것들에게도 웃어주는 거야 왜 따뜻한 거야 왜 모두에게 다정한 거야 보름 달밤 오른쪽 왼쪽 볼이 푸르스름해진 달 아유, 이 난경을 어쩐다지? 구름 많고 바람 잘 날 없는 해괴한 달밤 놀이터 벤치에서 연인들은 천 년 전처럼 사랑타령이고 달맞이꽃은 무더기로 훌쩍훌쩍 울고

  • 천 년 동안 고백하다 신지혜 著 내가 엮은 천 개의 달을 네 목에 걸어줄게 네가 어디서 몇 만 번의 생을 살았든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을게 네 슬픔이 내게 전염되어도 네 심장을 가만히 껴안을게 너덜너덜한 상처를 봉합해줄게 들숨으로 눈물겨워지고 날숨으로 차가워질게 네 따뜻한 꿈들은 풀꽃처럼 잔잔히 흔들어줄게 오래오래 네 몸 속을 소리 없이 통과할게 고요할게 낯선 먼 세계 밖에서 너는 서럽게 차갑게 빛나고 내가 홀로 이 빈 거리를 걷든, 누구를 만나든 문득문득 아픔처럼 돋아나는 그 얼굴 한 잎 다만 눈 흐리며 나 오래 바라볼게 천 년 동안 소리 없이 고백할게

  • 밤의 노래 황인숙 著 너는 그것이 어둠이 끌리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알았니 어둠 속에서 무엇이 끌리는지? 너는 그것이 바람이 끌리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알았니 바람 속에서 무엇이 끌리는지 내 심장에서 꺼낸 밤을 비단 손수건처럼 펼친다 아주 작은 수천의 비단 손수건들의 파동으로 나는 네 베개 위에서 잠든 너를 내려다본다 나는 너를 만질 수 없다 보고 또 볼 뿐 너는 단지 네 머리에 눌린 자국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알았니 그 자국에 닿아 있는 내 무릎 자국을?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꿈보다 더 허망한 것이었을망정 내 심장에서 느티나무 같은 밤이 자란다 너를 향해 내 발바닥엔 잔뿌리들 간지러이 뻗치고 너를 만지고 싶어서 내 모든 팔들에 속속 잎새들 돋아난다

  • 폭설, 민박, 편지 1 김경주 著 주전자 속엔 파도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인편이 잘린 외딴 바닷가 민박집, 목단이불을 다리에 둘둘 말고 편지를 썼다 들창 사이로 폭설은 내리고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들을 만지고 있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처럼 쌓여갔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쓰다만 편지지로 소금바람이 하얗게 쌓여 가는 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움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쓸쓸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푹푹 끓기 시작하고 방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

  • 안녕, UFO 박선경 著 비가 온다 시작도 알 수 없이 대기의 틈새로 흘러가는 빗줄기의 한 부분을 나는 달리고 있다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방울 저 끝에서 열기를 잃은 쓸쓸한 빛의 입자들이 눈부시게 반짝, 그러나 나는 이미 흘러가고 없다 끝없이 하강 중이던 너는 어디로 갔을까 우린 서로의 신호를 알아보지 못하고 쓸쓸히 떠나버린 우주선, 잠시 마주친 서로의 이미지를 통과하는 중 빗방울 눈부신 은빛으로 오네 손을 흔들며 멈춰 서있네 작은 행성처럼 내 안에 있던 너의 이름들이 역류하네 일만 광년의 거리에서 일어나는 별의 폭발, 눈부신 파편들이 저마다 홀로 타오르며 사라져가네 나는 온 힘을 다해 말하네 네가 가고 있는 그곳에 나 좀 데려다줄래 나는 공중에 머무네

  • 용두암 서안나 著 고백하지 마세요 이곳에선 회심懷心도 죄가 됩니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용을 닮은 덩치 큰 사내가 돌 속에 귀신처럼 서 있습니다 두 귀를 막으십시오 용두암은 한 사람이 남는 감정입니다 당신 등 뒤에서 왼손과 오른손으로 붙잡던 서늘한 영혼 역병처럼 당신에게 진득하게 옮겨 앉는 용두암 바위산의 사내가 바위를 가르고 지상의 한 사람 앞에 물짐승처럼 젖은 무릎을 꿇을 때 비린 눈빛도 죄가 됩니다 고백하지 마세요 이곳에선 고백도 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