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집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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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부동자에게 류성훈 著 내 꿈은 안락사, 라고 되뇌어 보았다 살았다,는 건 내가 타지 않을 모든 차표를 끊는 일, 사라진 들보 위에 물 하나 떠 놓는 일 손끝부터 심장까지 다 아프다면서 왜 내버려 두었냐고 더욱 화를 내듯이 여긴 올 곳이 못 된다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다그치듯이 안락하게 너는 떠났길, 그 믿음이 따뜻한 이불 속에서 방법 없이 아플 때 잠 속에서만 더 많이 자라던 보풀들이 지금은 없는 곳에 굴러다닐 때 밥은 넘기다가 아직도 사랑은 한다 쓰다가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는 퇴원 당신은 당신을 만났을까 항상 삶보다 더 긴 추억을 따라가면 하얀 유기견이 나를 올려다본다 길에서 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거기 있다, 맑아서 버려야 할 이곳엔 아무도 살아 있지 않은 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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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6번째 신 대멸종 최백규 著,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수록 봄이 와도 죽음은 유행이었다 꽃이 추락하는 날마다 새들은 치솟는다는 소문이 떠돌고 창밖엔 하얀 유령들만 날렸다 네평 남짓한 공간은 눈이 흩어진 개의 시차를 앓고 핏줄도 쓰다듬지 못한 채 눈을 감으면 손목은 펜 위로 부서지는 파도의 주파수가 된다 그럴 때마다 불타는 별들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심장 끝에서 은하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안다 늙은 항성보다 천천히 무너져가는 지구라면 사각의 무덤 속에는 더러운 시가 있을까 흙에서 비가 차오르면 일 초마다 꽃이 지는 순간 육십 초는 다음 해 꽃나무 퍼지는 담배 향을 골목에 앉아있는 무거운 돌이라 생각해보자 얼어붙은 명왕성을 암흑에 번지는 먼 블랙홀이라 해보자 천국은 두 번 다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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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김선우 著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 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 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아 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 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지구의 시간 해 지자 비가 내린다 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 잠시 겹쳐진 우리는 잠시의 기억으로도 퍽 괜찮다 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 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 하는 이런 시간이 좋아 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 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 있잖니, 몸이 사라지려 하니 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야. 알게 될 날이야. 축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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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다락 최현우 著 절박해 보여 아니, 배가 고픈가? 저 눈동자는 아래로 흐르려나 지겨워 보여 재미없나? 그런 건 아니래 미안하다며 돌아간다 너무 많은 시를 쓰느라 마음을 잃었구나 서글퍼 보여 아니, 이젠 믿음이 없나? 말조심해 증오와 긍휼을 착각하는 자야 닳아 없어지는 생활에 지문이 궤적을 남긴다 이걸로는 아무것도 씻을 수 없지 저 찰기 없이 마른 손바닥을 봐 수많은 금을 만든 채로 불쑥 들어온다 부서져 보여 아니, 억지로 붙여 놓은 듯이 안아 달라고 말해 묶고 꺾고 묻히고 닦아 달라고 말해 잡고 놓지 말라고 말해 차라리 구해 달라고 말해 내 영혼의 깊은 바닥 당신의 정수리가 보입니다 저희 노래가 들리십니까 필요 없어? 쉿, 누군가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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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터 하린 著 달을 삼키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실패다 곪아터진 걸 들키지 않으려고 웃고 있는 저 달 아래 누군가 나 대신 치욕을 참고 있다 왜 중심은 쓸모없이 위험한가 바람이 앉았다 간 자리 새알이 있고 비가 앉았다 간 자리 안개가 있는데 당신이 앉았다 간 자리엔 증오가 없다 아무도 나쁜 높이에 대해 말해주지 않기에 난간의 승리를 접어두기로 하자 달을 넘보던 구름만 무탈했으니 나는 완벽한 패배로 증명된다 폭우가 오지 않는 날엔 뒤돌아서지 않으려 했다 잘 가라는 흔드는 손 따윈 없어도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에게 쉽게 낭떠러지를 들키고 만다 심장 속에 만월은 없고 그믐만 있다만 황무지는 없고 수렁만 있다만 시래기처럼 바짝 나를 말려 달무리 속에 풀어 놓으련다 달 속엔 도달할 수 없는 데인 자국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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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편지 황경신 著 편지를 쓸까 했어요 무슨 말로 시작할까 생각했어요 생각을 하다보니 해야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말도 없었어요 난 잘 지내기도 하고 못 지내기도 해요, 라는 말도 웃기죠 아무 내용도 없잖아요 잘 지내요? 라는 질문도 이상하죠 못 지낸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잘 지내세요. 도 그래요 사실 난 당신이 좀 못 지내면 좋겠거든요 하지만 그런 소릴 할 수는 없죠 난 잘못한 것도 없이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렸고 이제 와서 그걸 바로잡을 수도 없는데 마음이 어떻든 뭐가 바뀌겠어요 잔인하죠? 이게 우리의 미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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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움 유에서 유 수록, 오은 著 파란색과 친숙해져야 해 바퀴 달린 것을 좋아해야 해 씩씩하되 씩씩거리면 안 돼 친구를 먼저 때리면 안 돼 대신, 맞으면 두 배로 갚아줘야 해 인사를 잘 해야 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해 받아쓰기는 백 점 맞아야 해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돼 밤에 혼자 있어도 울지 말아야 해 일기는 솔직하게 써야 해 대신, 집안 부끄러운 일은 쓰면 안 돼 거짓말은 하면 안 돼 꿈을 가져야 해 높고 멀되 아득하면 안 돼 죽을 때까지 내 비밀을 지켜줘야 해 대신, 네 비밀도 하나 말해줘야 해 한국 팀을 응원해야 해 영어는 잘해야 해 사사건건 따지려고 들면 안 돼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돼 대신, 정말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야만 해 가족을 지켜야 해 학점을 잘 받아야 해 꿈을 잊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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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온갖 것들의 낮 수록, 유계영 著 거리의 모든 사람들아 너는 벗겨지고 흰 깃발이 드러난다 너는 벗겨지고 바깥에서 문 잠그는 소리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너희가 잠자코만 있어 준다면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의 귀를 만져 본다면 이런 느낌일 거야 방향을 멈춘 깃발의 긴장 너도 나도 다 가진 비밀이라면 난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봐, 이렇게 쉬운 평화 거리의 모든 사람들아 너는 외계의 메시지이고 너는 우주와의 시차이다 양산 속의 꽃무늬가 지르는 비명 때문에 나는 인상을 쓰고야 만다 우리가 사랑한 계절에는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것 태양이면서도 태양이 아닌 것 때로는 태양이기만 한 것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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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서랍 비단길 수록, 강연호 著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뻑뻑한 더께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적박하다 나야, 외출했나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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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인 이유 임지은 著 슬픔이 빈티지인 이유를 말해준다니까 너는 외국 도시 이름 같다고 한다 외국에서는 슬픔도 머플러가 될 수 있다고 한겨울 목에 두르면 부러운 나머지 북극곰이 찾아올 수도 있겠다고 슬픔이 빈티지인 이유를 말해준다니까 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겨울이 취미인 그들은 체크무늬 장갑을 샀고 하나씩 나눠 낀 채 동물원을 빠져나갔다고 내 손 위에 너의 손을 포갠다 우리가 슬픔을 숨기지 않고 가꿀 수 있다면 창틀 위에 쌓인 눈 눈이 가득히 덮인 숲 그 흰색에 가까운 따듯함으로 서로를 쓰다음었을 텐데 우리는 등이 간지러운 북극곰처럼 마주 앉아서 빈티지를 말한다 겨울이 녹고 있으니까 슬프고 기르던 개를 만날 수 없어 슬프다 오래된 것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슬픔이 빈티지인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