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錄

시 모음집 165

카테고리 설명
좋아하는 시를 올립니다.
  • 행성의 노래 허연 著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람들은 별을 가져다 기껏 노래를 만들었다 오늘도 천만 년 된 햇볕이 내 얼굴에 와 부딪힌다 천만 년 전 태양을 떠난 그 햇살이 내게 말한다 생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삼키는지 똑똑히 지켜보라 욕망이 욕망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 천만 년 전 그 첫날이 뒤늦게 도착하고 두 번째 날도 세 번째 날도 계시는 언제나 천만 년 전으로부터 왔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생은 나를 삼키고 있었다 위대한 것들은 위대해서 아득하다. 남아 있는 생이여.

  • 오십 미터 오십 미터 수록, 허연 著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

  • 제3비극 이이체 著 미래는 늘 현재인 것처럼 도래한다. 잠이 고여 있는 밤, 나를 줄 수 있는 공허가 내게 왔다.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사랑이 부재 속에 매복해 있다. 삶이나 죽음을 피한다 해도 생사의 굴레를 벗을 수는 없다. 살거나 죽는다고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윤곽이 없어졌다. 영원하지 않은 아픔을 간직한다. 존재의 패잔병들은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부재로 회피할 수 있는 연옥. 파괴될 수 있는 인간을 파괴하지 않는다. 나는 미치기 위해 태어났다. 아름다운 것은 계속 훔쳐보게 된다. 의미가 사라질 수만 있다면 빛으로 만든 공허를 나에게, 부디 나에게.

  • 타오르는 노래 이이체 著 내 것이 아닌 이명(耳鳴)이 내 귀를 환하게 밝힌다 들을 수 있으나 노래할 수는 없는 선율 계속 들리는 선율이 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단 한 번 들었다는 기억만 남아 울린다 들었다는 기억이 들려오는 선율보다도 선명한 혼자 타오르기만 하는 노래. 귓속은 깊어지면서 나를 늙게 했고, 듣기만 할 뿐 노래할 수 없다는 죄책감을 닮은 무력감이 나를 죽지 못하게 한다. 아름다워서 숨이 막힐 치사량의 음악에 내 호흡은 뒷걸음질 치며 서서히 미쳐가는 것이다. 노래가 다 타버린다면 선율은 이석(耳石)처럼 굳건한 사상(思想)으로 남을 것이다.

  • 북극 나비 김하늘 著 흰 발을 물에 담그면 많은 것들이 괜찮아져 우산을 숨기지 않아도 파래지는 시간 우리는 12시적인 것들을 사랑하자고 맹세했지 따뜻한 고양이 똥, 한 스푼의 컵케이크, 파란 나비 같은 것들 너는 수요일이라고 했어 그런 날에는 부패한 소시지처럼 물속에 있자고 추위의 세계에 대해서만 생각하자고 지루할 정도로 쉬고 싶다고 속삭였어 몸을 말아서 동그란 게 아니라 동그랗기 때문에 온몸을 이렇게 말고 있는 거라며 다슬기처럼 아주 가끔씩 살아 있는 흉내를 냈지 나는 고요를 쬐며 막 두 번째 허물을 벗고 있었어 팟-르르르 팟-르르르 젖은 날개를 말리는 동안 한 쌍의 나비가 되는 우리 모든 게 침묵하는데도 진화하는 것들은 어떤 무심함을 인내하는 걸까 그런 생각으로 아무것도 껴안지 못하는 마음 물속에서 ..

  • 비밀 노트 배수연 著 나 조금 죽으면 안 될까 조금 얼어 있으면 될까 잠드는 건 싫고 조금 죽으면 안 될까 잠자는 모습 전혀 무섭지 않으니까 나 조금 죽으면 안 될까 조금 멎을 수 있을까 기절하는 건 싫고 갈비뼈를 너무 심하게 누르진 말아 줘 모두들 놀라 눈이 커지겠지 나 무서워 보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안 하면서 거짓말처럼 보일 수 있을까 곰이라고 거짓말하는 곰 인형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

  • 하루 종일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수록, 최승자 著 하루 종일 군시렁거리는 구름들만 바라본다 시간은 무의미를 겨냥하는 것일까 맑은 슬픔 진짜 혁명이 안 되는 이유는 우리들의 너무 많은 이기심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은 혁명 없는 혁명 나는 하루 종일 군시렁거리는 구름들만 바라본다

  • 고아의 별 신동옥 著 먼지 낀 사방나무가 비트 밖 오솔길에 그림자들 드리울 때 기억에 가물가물한 타깃의 표정을 애써 떠올린다. 기적처럼 너를 다시 보는구나. 네가 아직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캐묻는 듯한 푸른 눈동자 모두 고아야, 삶은 거저 주어졌단다. 낯선 피를 받아들이려는가 별은 뾰족하고 소리가 없다. 눈을 감으면 어둠을 볼 수 없어. 이봐, 삶을 아끼지 마. 아득하고 그윽하고 깊고 쓸쓸한 총구 속에서 짐짝처럼 어둠에 실려서 살점은 이장移葬하는 일 이봐, 삶을 아끼지 마. 눈을 감으면 어둠을 볼 수 없어.

  • 눈사람의 사회 눈사람의 사회 수록, 박시하 著 각이 모조리 사라졌는데도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마주 보고 있지만 악수를 청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웃거나 울고 있다면, 그건 첫눈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나 이별의 습관 때문입니다 어떤 기분일 뿐입니다 춤을 추면 굴러갈 수 있다구요? 그럼, 눈 오는 날 하얀 새들은 길을 잃어버릴까요? 새들은 어디서 밤새 녹아내리나요? 한쪽 눈썹은 원래 그렇게 우스웠나요? 코가 비뚤어진 건 내 탓이 아닙니다 줄줄 심장이, 결국, 흘러내렸나요? 몸이 둥근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이 넘어집니다 우리는 더욱 조용히 웃고 펑펑, 희미하게 웁니다 눈 내리는 창 너머에서 누군가 새 눈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바닥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 소금사막에 뜨는 별 다정한 호칭 수록, 이은규 著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 꿈꿔야 할 문장은 잠언이 아닌, 모래바람을 향해 눈뜰 수 있는 한 줄 선언이어야 할 것 사막 쪽으로 비껴 부는 바람 꿈으로도 꿈꾸던 달의 계곡 지나 이국의 마을 바다에서 솟아오른 사막이 있다 당신은 물을까, 왜 소금사막이어야 하는지 만약 그리움이라는 지명이 있다면 비 내린 소금사막에 비치는 구름 근처일 것이다 끝없이 피어올라도 다시 피어오를 만큼의 기억을 간직한 구름 빗물 고인 소금사막에 떠 있는 기억의 신기루 그 풍경을 손에 담으면 구름을 간직할 수 있을까 간직을 꿈꾸게 하는 이름들 구름과 당신이 같은 종족임을 말하지 않겠다 소금사막에 밤이 오면 별, 하늘을 찢고 나온 고통 한 점 노래 쏟아지는 별빛에 살갗이 아플까..

  • 미완성 교향곡 어두운 저편 수록, 김행숙 著 소풍 가서 보여 줄게 그냥 건들거려도 좋아 네가 좋아 상쾌하지 미친 듯이 창문들이 열려 있는 건물이야 계단이 공중에서 끊어지지 건물이 웃지 네가 좋아 포르르 새똥이 자주 떨어지지 자주 남자애들이 싸우러 오지 불을 피운 자국이 있지 2층이 없지 자의식이 없지 홀에 우리는 보자기를 깔고 음식 냄새를 풍길 거야 소풍 가서 보여 줄게 건물이 웃었어 뒷문으로 나가 볼래? 나랑 함께 없어져 볼래? 음악처럼

  • 풍경의 해부 조용미 著 저렇게 많은 풍경이 나를 거쳤다 저렇게 많은 풍경의 독이 네 몸에 중금속처럼 쌓여 있다 올리브나무 사이 강렬한 태양은 언제나 너의 것, 너는 올리브나무 언덕을 지나갔다 양귀비들은 그 아래 붉게 흐드러져 있다 바다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 알시옹처럼 너는 운명을 다스리는 힘을 가졌다 이곳의 햇빛은 죄악을 부추긴다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불가해한 세계가 바로 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