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집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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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미터 오십 미터 수록, 허연 著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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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비극 이이체 著 미래는 늘 현재인 것처럼 도래한다. 잠이 고여 있는 밤, 나를 줄 수 있는 공허가 내게 왔다.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사랑이 부재 속에 매복해 있다. 삶이나 죽음을 피한다 해도 생사의 굴레를 벗을 수는 없다. 살거나 죽는다고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윤곽이 없어졌다. 영원하지 않은 아픔을 간직한다. 존재의 패잔병들은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부재로 회피할 수 있는 연옥. 파괴될 수 있는 인간을 파괴하지 않는다. 나는 미치기 위해 태어났다. 아름다운 것은 계속 훔쳐보게 된다. 의미가 사라질 수만 있다면 빛으로 만든 공허를 나에게, 부디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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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노래 이이체 著 내 것이 아닌 이명(耳鳴)이 내 귀를 환하게 밝힌다 들을 수 있으나 노래할 수는 없는 선율 계속 들리는 선율이 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단 한 번 들었다는 기억만 남아 울린다 들었다는 기억이 들려오는 선율보다도 선명한 혼자 타오르기만 하는 노래. 귓속은 깊어지면서 나를 늙게 했고, 듣기만 할 뿐 노래할 수 없다는 죄책감을 닮은 무력감이 나를 죽지 못하게 한다. 아름다워서 숨이 막힐 치사량의 음악에 내 호흡은 뒷걸음질 치며 서서히 미쳐가는 것이다. 노래가 다 타버린다면 선율은 이석(耳石)처럼 굳건한 사상(思想)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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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나비 김하늘 著 흰 발을 물에 담그면 많은 것들이 괜찮아져 우산을 숨기지 않아도 파래지는 시간 우리는 12시적인 것들을 사랑하자고 맹세했지 따뜻한 고양이 똥, 한 스푼의 컵케이크, 파란 나비 같은 것들 너는 수요일이라고 했어 그런 날에는 부패한 소시지처럼 물속에 있자고 추위의 세계에 대해서만 생각하자고 지루할 정도로 쉬고 싶다고 속삭였어 몸을 말아서 동그란 게 아니라 동그랗기 때문에 온몸을 이렇게 말고 있는 거라며 다슬기처럼 아주 가끔씩 살아 있는 흉내를 냈지 나는 고요를 쬐며 막 두 번째 허물을 벗고 있었어 팟-르르르 팟-르르르 젖은 날개를 말리는 동안 한 쌍의 나비가 되는 우리 모든 게 침묵하는데도 진화하는 것들은 어떤 무심함을 인내하는 걸까 그런 생각으로 아무것도 껴안지 못하는 마음 물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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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의 사회 눈사람의 사회 수록, 박시하 著 각이 모조리 사라졌는데도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마주 보고 있지만 악수를 청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웃거나 울고 있다면, 그건 첫눈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나 이별의 습관 때문입니다 어떤 기분일 뿐입니다 춤을 추면 굴러갈 수 있다구요? 그럼, 눈 오는 날 하얀 새들은 길을 잃어버릴까요? 새들은 어디서 밤새 녹아내리나요? 한쪽 눈썹은 원래 그렇게 우스웠나요? 코가 비뚤어진 건 내 탓이 아닙니다 줄줄 심장이, 결국, 흘러내렸나요? 몸이 둥근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이 넘어집니다 우리는 더욱 조용히 웃고 펑펑, 희미하게 웁니다 눈 내리는 창 너머에서 누군가 새 눈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바닥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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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사막에 뜨는 별 다정한 호칭 수록, 이은규 著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 꿈꿔야 할 문장은 잠언이 아닌, 모래바람을 향해 눈뜰 수 있는 한 줄 선언이어야 할 것 사막 쪽으로 비껴 부는 바람 꿈으로도 꿈꾸던 달의 계곡 지나 이국의 마을 바다에서 솟아오른 사막이 있다 당신은 물을까, 왜 소금사막이어야 하는지 만약 그리움이라는 지명이 있다면 비 내린 소금사막에 비치는 구름 근처일 것이다 끝없이 피어올라도 다시 피어오를 만큼의 기억을 간직한 구름 빗물 고인 소금사막에 떠 있는 기억의 신기루 그 풍경을 손에 담으면 구름을 간직할 수 있을까 간직을 꿈꾸게 하는 이름들 구름과 당신이 같은 종족임을 말하지 않겠다 소금사막에 밤이 오면 별, 하늘을 찢고 나온 고통 한 점 노래 쏟아지는 별빛에 살갗이 아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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