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
<포엠포엠> 2016년 가을호 수록, 정다연 著
내가 너의 언니가 되어줄게 동생이 되어줄게
사각형의 창문 앞에서 네가 과일을 썰 때, 석류의 배를 가를 때, 꺼내 먹은 열매가 피 울음처럼 느껴질 때 손목을 타고 과육이 흐를 때 손에 든 식칼이 무겁다고 느낄 때 네가 서 있는 풍경이 살육의 한복판이라고 느낄 때 괜찮아 내가 너의 언니가 되어줄게 동생이 되어줄게
푸른 집의 욕조 그 안에서 네가 물을 틀 때 네가 아닌 다른 누구도 수도꼭지를 잠가주지 않을 때 깨진 타일, 더러워진 얼룩이 벽을 타고 번져나갈 때 네가 욕조에 누워 조용히 금 갈 때, 숨을 참고 머리를 담글 때 만져지는 네가 투명한 잡초처럼 느껴질 때 내가 너의 언니가 되어줄게 동생이 되어줄게
거미줄이 쳐진 다락방, 이불보를 덮고 네가 호흡할 때 머리맡에 살아있는 것이라곤 선인장밖에 없을 때 문득 그것을 끌어안고 싶다고 느낄 때 아무리 덧창을 잠가도 찬송가가 울려 퍼질 때 발작적으로 혼잣말할 때 창밖의 눈송이가 널 감시하는 눈동자로 느껴질 때 혹한보다 깊은 공포가 널 덮칠 때 내가 너의 동생이 되어줄게 언니가 되어줄게
타오르는 종소리, 빛에 홀린 천사들이 네게 날아들어 죽어라 죽어라 저주를 퍼부을 때 아무리 잘라내도 그림자가 네 발꿈치에서 솟아날 때 하늘이 푸른 재난처럼 너에게 몰려올 때 빛이 나방을 불태우고 숲을 태울 때 그 속을 네가 맨발로 걸어 나갈 때 나뭇가지마다 죽은 개가 널 쳐다보고 있을 때 사라져 사라져 킬킬거릴 때 내가 너의 동생이 되어줄게 언니가 되어줄게
내가 너의 동생이 아니어도. 언니가 아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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