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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설명
  • 춤의 독방 이혜미 著 나는 이제 막 절망하기를 마친 사람. 무엇의 중심도 되지 않으려 너의 손을 잡고 경쾌하게 돌고 돈다 흐린 장막이 펼쳐진다. 두렵지 않니? 서로 다른 몸이 하나의 시간에게 벌이는 일이. 두근대지 않니? 저 수많은 점들이 편재하며 사람에게 문양을 허락하는 일이. 그것들 별자리를 이룰 줄 알았는데. 잘못 그어준 선들이 서로를 깊이 추워한다. 나는 무엇이라도 붙잡고 흐르는 자, 문장이 아닌 척 노래 속으로 스며들면 너의 불신은 얼마든지 나의 양식이 된다. 이 음악이 끝나더라도 홀로 있는 한 너와 나는 완벽해진 한 쌍. 아름다운 그림자를 가지기 위해 서로를 배제하는 법을 익혔지. 그것을 너는 소용되지 않는 말들로 이루어진 행성이라 했지만, 나는 그 어둠에 손을 담근 채 떠나갈 수 있을 것이라..

  •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사랑의 어두운 저편 수록, 남진우 著 그리하여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낡은 수첩 한 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 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나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 구석에 밀어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 근황 최승자 著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오규원 著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그 느낌이 내 머리의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너에게 허영숙 著 너를 알고부터 시간은 뒤로 가기 시작했다는 걸 한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노을을 눈에 담을 때마다 지는 아름다움을 읽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청보리를 닮은 푸릇한 미소가 불면을 흔들어대면 베개 속으로 젖어드는 눈물에 온통 너로 무장된 가슴이 녹아내리고 사랑이라 불리는 세상 모든 말들이 한 사람에게로만 향하는 의미가 되어간다 날마다 심장을 도려내는 아름을 안고 뒹굴며 밤새 울다 지쳐도 아침이면 빛으로 다시 서는 결 고운 사랑 앞에 먼 후일 내가 절망에 섰을 때 너는 내 마지막 희망이었으면 한다

  • 하류에서 성원근 著 너의 아름다움을 찾아주기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더러워지는 거다 너의 깊은 슬픔 배 띄워주려고 더 넓어지고 깊어질 뿐이다 그렇지만 너는 연꽃 나는 뻘 이렇게 흘러흘러 바다에서나 함께 될 수밖에 없는가 찬란히 피어나거라 네가 지면 바다가 거두어 갈 것이다 기다리겠다

  • 오래된 서적 기형도 著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났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

  • 별 이름 작명소 이은규 著 고단한 잠은 멀리 있고 나를 찾지 못한 잠은 누구의 호흡으로 도착해 하룻밤을 보내고 있을까 나는 아직 아름다운 운율에 대한 정의를 잠든 그의 숨소리라고 기록한다 두 눈을 꼭 감으면 잠이 올 거야, 없는 그가 다독이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두 눈을 꼭 감으면 감을수록 떠도는 별들이 동공의 어두운 웅덩이를 찾아와 유성우(流星雨)로 내렸다 밤새 유성우로 내리는 별들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면 차가운 호흡과 별들이 돌아가는 시간이 꼭 알맞았다 오랫동안 성황을 이룰, 별 이름 작명소 잠을 설친 새벽이 눈뜰 때마다 검은 액자 속 한 사람과 마주쳤다 날마다 희미해지는 연습을 하는지 명도를 잃어가는 사진 한 장 별이 태어나는 차가운 먼지구름 속 아무도 그가 먼지구름에 도착했다는 안부를 전해주..

  • 나는 네가 박상순 著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 와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면 좋겠다 인공 딸기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

  • 하루살이와 나귀 권영상 著 해 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 줄래? 하루살이가 나귀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안 돼 내일도 산책 있어 모레, 모레쯤이 어떠니? 그 말에 하루살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섭니다 넌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 직녀 일기 김인육 著 오늘은 이 별에서 뛰어내리기 좋은 날이에요 앨버스트로의 눈부신 날개와 코스모스 속곳은 벗어두고 가요 내가 이 별을 떠난 흔적이죠 한 오백 광년쯤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그대 사는 별까지는 좀 외로운 여행이긴 하죠 난쟁이가 사는 초록행성과, 가시 장미들이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소행성 B29에서 잠시 쉬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물고기자리를 지날 땐 부풀어 오르는 태양풍 오로라를 조심해야 해요 자칫 우리의 기억이 휘리릭 머플러처럼 날아가 버릴 수가 있어요 그러면 난 만나도 그대를 알 수가 없죠 깜깜한 암흑처럼 원초적으로 슬프죠 와우 당신이 저만치서 보이네요, 양떼를 몰며 피리를 부는 당신 내가 떠나온 별자리가 갑자기 눈부시게 환해지기 시작했어요 당신을 만났으므로 내 별은 이제 막 초신성이 되..

  • 너를 알고 난 후 정우경 著 어떤 날은 내 마음을 온통 다 네가 가져버린 때도 있었다 내 생각보다 네 생각이 많아 내가 너인 때도 있었다 비울래야 비울 수 없어 오히려 가득해지는 그리움 버릴래야 버릴 수 없어서 안으로만 자라난 그리움 아무리 불러도 울리지 않는 음성 아무리 내밀어도 닿지 않는 손길 내 안에서 나보다 더 커버린 나라는 또 다른 너는 서러운 눈물일 때도 있었다 그저 머언 하늘일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