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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윤진화 著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세계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읊조립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 속에 가득한 혁명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당신에게 답장을 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 나도 당신처럼 시詩를 섬기며 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부끄럽지 않게 봄을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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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길 황인숙 著 달을 향해 걷는 발걸음 소리 목적도 축도 없이 밤이 빙글 도는 소리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는 소리 한숨 소리 나무가 호흡을 바꾸는 소리 담쟁이 잎사귀가 오그라드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에 성큼 담벼락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림자 소리 너무 지쳐서 꼼짝도 못하겠어 벤치에서 한 노인이 이 빠진 달의 찻잔을 어루만지는 소리 가로등이 파르르 떨리는 소리 아무 반항 없는 시간의 기침 소리 잠이 회유하는 소리 잠시 구름이 멈추는 소리 나는 네가 밤길을 걷는 것을 본다 네게서는 달의 냄새가 난다 너는 걷고, 걷고, 걷는다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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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괴한 달밤 김선우 著 딱- 딱- 따귀 때리는 소리 같은 것이 중천에서 때마침 기다린 손바닥 같은 구름이 달을 가리며 지나가는데 따악- 아이구 저거, 달이 따귀를 맞고 있는 거 아냐? 연거푸 달려온 구름들의 뭇매를? 토라진 구름 씩씩대는 구름 입술을 잘근 씹는 구름 저마다 자기 사연이 가장 애달프다는 듯 명랑하게도 왜 네 빛은 나만 비추지 않는 거야 왜 나만 사랑하지 않는 거야 왜 외간 것들에게도 웃어주는 거야 왜 따뜻한 거야 왜 모두에게 다정한 거야 보름 달밤 오른쪽 왼쪽 볼이 푸르스름해진 달 아유, 이 난경을 어쩐다지? 구름 많고 바람 잘 날 없는 해괴한 달밤 놀이터 벤치에서 연인들은 천 년 전처럼 사랑타령이고 달맞이꽃은 무더기로 훌쩍훌쩍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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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동안 고백하다 신지혜 著 내가 엮은 천 개의 달을 네 목에 걸어줄게 네가 어디서 몇 만 번의 생을 살았든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을게 네 슬픔이 내게 전염되어도 네 심장을 가만히 껴안을게 너덜너덜한 상처를 봉합해줄게 들숨으로 눈물겨워지고 날숨으로 차가워질게 네 따뜻한 꿈들은 풀꽃처럼 잔잔히 흔들어줄게 오래오래 네 몸 속을 소리 없이 통과할게 고요할게 낯선 먼 세계 밖에서 너는 서럽게 차갑게 빛나고 내가 홀로 이 빈 거리를 걷든, 누구를 만나든 문득문득 아픔처럼 돋아나는 그 얼굴 한 잎 다만 눈 흐리며 나 오래 바라볼게 천 년 동안 소리 없이 고백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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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노래 황인숙 著 너는 그것이 어둠이 끌리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알았니 어둠 속에서 무엇이 끌리는지? 너는 그것이 바람이 끌리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알았니 바람 속에서 무엇이 끌리는지 내 심장에서 꺼낸 밤을 비단 손수건처럼 펼친다 아주 작은 수천의 비단 손수건들의 파동으로 나는 네 베개 위에서 잠든 너를 내려다본다 나는 너를 만질 수 없다 보고 또 볼 뿐 너는 단지 네 머리에 눌린 자국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알았니 그 자국에 닿아 있는 내 무릎 자국을?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꿈보다 더 허망한 것이었을망정 내 심장에서 느티나무 같은 밤이 자란다 너를 향해 내 발바닥엔 잔뿌리들 간지러이 뻗치고 너를 만지고 싶어서 내 모든 팔들에 속속 잎새들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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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민박, 편지 1 김경주 著 주전자 속엔 파도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인편이 잘린 외딴 바닷가 민박집, 목단이불을 다리에 둘둘 말고 편지를 썼다 들창 사이로 폭설은 내리고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들을 만지고 있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처럼 쌓여갔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쓰다만 편지지로 소금바람이 하얗게 쌓여 가는 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움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쓸쓸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푹푹 끓기 시작하고 방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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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UFO 박선경 著 비가 온다 시작도 알 수 없이 대기의 틈새로 흘러가는 빗줄기의 한 부분을 나는 달리고 있다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방울 저 끝에서 열기를 잃은 쓸쓸한 빛의 입자들이 눈부시게 반짝, 그러나 나는 이미 흘러가고 없다 끝없이 하강 중이던 너는 어디로 갔을까 우린 서로의 신호를 알아보지 못하고 쓸쓸히 떠나버린 우주선, 잠시 마주친 서로의 이미지를 통과하는 중 빗방울 눈부신 은빛으로 오네 손을 흔들며 멈춰 서있네 작은 행성처럼 내 안에 있던 너의 이름들이 역류하네 일만 광년의 거리에서 일어나는 별의 폭발, 눈부신 파편들이 저마다 홀로 타오르며 사라져가네 나는 온 힘을 다해 말하네 네가 가고 있는 그곳에 나 좀 데려다줄래 나는 공중에 머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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