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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중독 수록, 김박은경 著 따귀를 한 대 갈기다 보면 안고 싶고 이제 그만 안녕, 하다 보면 어머 안녕, 하고 싶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다 보면 어쩌다 그럴 수도 있을 거 같고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들을 대려면 셀 수 없이 많은 핑계들이 생겨나고 진실처럼 보이는 진실과 진실인 진실, 고통처럼 보이는 고통과 고통인 고통, 죽고 싶다 말하지만 정말로 죽고 싶지는 않고 살고 싶다 말하지만 정말로 살았던 적 없고, 죽고 싶은데 누가 자꾸 살려놓는 거니 살고 싶은데 왜 목을 조르는 거야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아니,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거 맞잖아 고백은 뻔해서 아무도 안 믿는다 유서는 약발 떨어졌다 울고 소리쳐도 벽에 머리를 박아도 달라지지 않는다 높은 데서 떨어져도 괴물처럼 살아날 거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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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주행 배수연 著 거대한 수사슴을 치었어요 입을 벌리면 잉크가 쏟아지는 밤이었고 내 영국산 지프 앞에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는 큰 뿔 사슴이 있었어요 나는 사슴이 넘을 수도 태울 수도 없어 어느새 한 시간째 경적만 울렸어요 사슴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해요 제발 그만,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거야 왜 내 앞으로 뛰어든 거야? 사슴의 터진 몸에서 나오는 빛나는 주홍 알갱이들 그건 껍질이 벗겨진 귤의 살처럼 쓰러진 채 물을 흘렸고 나는 뒷좌석에서 얼굴을 싸매고 밤을 새웠어요 고개를 숙일수록 차오르는 주홍 강물 이 밤이 지나면 우린 달리는 것과 흐르는 것들의 목적지에 닿을 거야 그곳에선 너와 나의 이름을 말하는 이도 부르는 이도 없겠지만 태양 아래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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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아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록, 나희덕 著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는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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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와 나 이성미 著 오후와 함께 희미해졌어요 내가 조금씩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태양도 함께 다른 시간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도 함께 너를 희미하게 하려 했는데요 그러다가 오후 속으로 들어가 희미해졌어요 내가 너는 간절히 믿었겠죠 내가 없다고 나는 투명해졌어요 비로소 오후와 함께 의자에 얹힌 엉덩이와 의자가 의자의 다리와 나의 다리가 나의 얼굴과 그 옆이 뭉개집니다 너는 오후를 통과합니다 네가 오후 속에 앉아 있는 나를 통과합니다 나는 팔을 뻗어 너의 몸속 그늘진 내장에 손을 댑니다 너의 불투명한 몸이 더 투명하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네가 도시 끝을 향해 떠납니다 네가 멀어지면서 하얀 그물처럼 투명해질 때 물고기처럼 나는 천천히 오후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태양과 바람을 느끼는 불투명한 덩어리로 돌아왔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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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의 노래 박지혜 著 그녀의 화단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아무도 없는 바다 위의 하얀 깃발을 그리며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하얘지며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그의 책들을 꺼내 읽으며 하염없는 문장 속에서 나오지 않으며 없는 사랑 없는 아름다움에 빠져 들어가며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하나의 감정에 하나의 감정에 하나의 감정이 비올라의 검은 지판 위에 아름다운 왼손이 말총으로 만들어진 활에 아름다운 오른손이 도솔레라 도솔레라 활털은 시베리아 말총이 좋아요 개방현 소리가 좋아 악보 없이 온종일 활을 그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는 어렵지요 운지법을 기록하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을 기록하고 감정에 실패하고 감정의 기록에 자주 실패하고 나는 점점 말하는 법을 잊어가고 이대로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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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풀잎 노래로 가는 배 수록, 유경환 著 마른 풀잎 속엔 엽맥(葉脈)의 질긴 기도가 남아 있다. 끊기지 않던 가녀린 목숨 소리 하늘에 내뿜던 숨 멈춘 채 멈춘 그대로 버리지 못한 소망을 아름답게 날려 가며, 세우던 고개는 떨어뜨렸으나 짙푸름으로 적시던 기다림 당신의 뜻에 발돋움하자던 춤, 그 몸짓을 모르리라. 바람에 시달리고 짐승에 밟혔어도 어떻게 지금부터 시야에서 사라지는가를 하늘이 하얗게 흙을 덮어 내리면 알리라. 끝바람에 몸 부서져 바서지는 것도 온몸 소리내며 태우는 불꽃 와 주지 않아도 닿지 않아도 들판 가득히 일어서는 영혼과 그리고 어딘가에 묻혀 거름이 되는 것 봄으로 미루는 부활을 마른 풀잎 속엔 기억해야 할 기도가 남아 있음을 당신 한 분이라도 당신 한 분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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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박소란 著 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뒤집어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그만 다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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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음표 조혜은 著 네가 죽었을 때, 나는 옅은 색 후회를 했지. 길어진 밤이 우리의 배를 관통했지. 우리의 불행을 상의하지 않고 통보했다는 이유로 너는 화를 냈고, 가족들은 우리가 만났다는 이유로 우리의 불행을 관조하다 조롱했지. 우리는 외롭고 희미한 길에서 끔찍한 적응을 하려고 만났지. 잊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게 힘들어서 잊히기 위해 노력하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 하지만 돌아가면 적응할 길이 없어.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분장을 해야 했지. 너무나 사랑해서 막다른 골목이 되었고, 찾을 길 없는 사진이 되었지. 찾아서 바라보다가 지금의 우리를 잊고, 내가 당신을 모르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는 뼛속부터 불친절했지. 하지만 나는 당신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서로를 증오하다 살이 녹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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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활용법 월간 태백 2017년 7월호 발표, 서안나 著 가능하면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책의 밖입니다 책장에서 죽은 나방을 보았습니다 도서관이 가벼워졌습니다 귀퉁이를 접으면 자국이 남습니다 백 년 전에 두고 온 감정이 접혀있습니다 죽음을 접을 수 있다면 당신은 죽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눈빛으로 영국에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질문은 한참 읽어도 확신이 없습니다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분류됩니다 포유류입니다 명사입니다 안녕 하는 두 개의 흰 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은 쉽게 나누어집니다 서가는 뱀눈처럼 아름답습니다 책을 읽으면 용서하는 기분이 됩니다 내가 슬픔이라 말하면 슬픈 것이 되는 것 그런 것 두 개의 흰 손으로 깊어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