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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웃거나 울면서 최현우 著 누구는 사라지기 위해, 누구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쓴다고 했다. 아름답자고, 추악해지자고, 자유와 자유의 실패 속에서 자란다고도, 죽는다고도, 아무것도 아니라고도. 인간의 안쪽으로, 바깥쪽으로, 한 손에는 모래 한줌, 한 손에는 온 우주를 쥐고 똑바로 걸어가는 거라고도 했다. 꽃을 샀다가 서둘러 탄 막차 속에서 망가져버렸다. 차마 버리지 못했다. 등뒤로 감추고 돌아왔는데 이런 예쁜 꽃다발을 어디서 가져왔냐고 환하게 웃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아주 오래도록,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어떤 균형으로만 위태롭게 서서 만나게 되는 무언가. 찰나에 마주서서 가만히 웃거나 우는, 어쩌면 그게 내가 하는 전부와 하고 싶은 전부가 아닐까, 절반은 알고 절반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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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남지은 著 난간에 선 존재는 자기를 망친 결벽을 떠올린다 아는 손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손으로부터 사랑하는 자로부터 사랑하지 않는 자로부터 일상의 머리채를 더듬더듬 건져올리기까지 사랑도 되고 폭력도 된다는 머리통을 깨부술 때까지 안도 되고 밖도 되는 곳이 있다 낮도 되고 밤도 되는 때가 있다 괜찮아? 춥지 않겠어? 다정한 물음이 있고 어떤 이야기를 계속하기 좋은 순간이 있다 조명이 어둡거나 테이블이 조금 흔들린대도 있잖아 하고 시작된 이야기가 그건 있잖아 하고 이어진다 옆 사람의 옷이 내 어깨에 걸리고 옆 사람의 말이 내 것처럼 들려서 옆 사람의 손에서 기울어진 찻잔같이 내 몸도 옆, 옆, 옆으로 기우뚱거리고 쏟아져도 괜찮아 낙관도 포기도 아닌 말이 마음에 닿기도 한다 난간에 기대어 자라던 식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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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노래 5 고은강 著 * 삶은 최전방이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삶이 너무 촘촘해서 삶에 질식할 것 같은 그 모든 격렬한 문장 속에서 목덜미를 풀어헤치고 나는 다만 노래 부르고 싶었을 뿐, 포효하고 싶었을 뿐, 아무리 소리쳐도 소리가 안 나 뻐끔뻐끔 담배나 피워대는 이 몸은 발암물질이다 불순분자다 근본 없는 혀다 버릇없는 어린아이다 나는 맹신하지 않았지 세상에 당연한 건 없으니까 이글거리는 나무 아래서 살갗이 타들어가는 슬픔 때문에 나는 무채색이다 뒤척이는 수면(睡眠)이다 아직은 고양이, 정복되지 않은 존재시다 * 우리는 피가 엉겨붙지 않는 거대한 혈족 같지 손가락이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꽉 끌어안고, 사랑은 말자 사랑해도 결혼은 말자 결혼해도 아이는 낳지 말자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아이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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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著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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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著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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