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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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아이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김경주 著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뺴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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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의 고독 카니발 수록, 조동범 著 발견되지 않은 루트를 따라 고독이 발굴되었다. 얼음산을 오르던 자들의 시신은 놀라운 고독으로 가득했고, 고독의 외로움은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시신들은 저마다 침묵하며 고독했으므로 죽은 자들의 흐느낌은 침엽수림을 돌아보며 어느덧 사라졌다. 누구나 침묵했고 언제나 고독했다. 돌아서면 세상은 고독한 폭설로 가득했다. 고독이 발굴되었지만 고독한 낮과 밤을 앞에 두고 세계의 모든 폐허는 말을 아꼈다. 지상은 이내 고독으로 가득 찼으므로 고독도 발굴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고독한 세월을 견디는 동안 눈보라는 그저 단조롭게 쏟아졌다. 죽은 자들은 잊혀졌고 오래된 씨앗의 발아는 요원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고독이야말로 고독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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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사랑의 어두운 저편 수록, 남진우 著 그리하여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낡은 수첩 한 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 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나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 구석에 밀어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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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적 기형도 著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났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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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무늬 조용미 著 별이 하늘의 무늬라면 꽃과 나무는 땅의 무늬일까요 별이 스러지듯 꽃들도 순식간에 사라지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불멸을 이루나 봅니다 하늘의 무늬 속에 숨어 있는 그 많은 길들을 저 흩어지는 꽃잎들은 알고 있는 듯합니다 이 꽃잎에서 저 꽃잎까지의 거리에 우주가 더 들어 있고 저 별빛이 이곳에 오기까지의 시간 또한 무한합니다 무한히 큰 공간과 거기 존재하는 천체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인 우주를, 그 우주의 은하에서 나는 누구도 아닌 당신을 만났군요 자기 자신에서 비롯되는 마음처럼, 샘물처럼 당신과 나는 이 우주에서 생겨났군요 우주는 깊고 별들은 낮아 나는 별들의 푹신한 담요에 누워 대기를 호흡해봅니다 천천히, 당신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그러다 나는 밤하늘로 문득 미끄러지듯 뛰어내릴까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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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오랜 불꽃 이용준 著 시든 벚나무 그늘 아래서 그대를 생각할 때 나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았네 괴로워 되뇌일수록 함정일 뿐인 꽃비 내리는 한 시절, 섭리와 운명을 무시하던 버릇이 우리의 가장 큰 행운이었으니 자꾸 사라지고 간혹 미치게 밝아오는 그대 병든 눈동자 무심코 나를 버리소서 귀머거리에게 음악이었고 벙어리에게는 부르고 싶은 이름이었던 그대, 내 가슴을 삶은 이 어두운 고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소서 기도 중 빛나는 상징이고자 하였으나 악몽의 피비린내 나는 통곡밖에는 될 수 없었던 저 먼 별들, 오랜 불꽃, 그립다는 그 말의 주인인 그대, 가시밭길을 걷는 맨발의 소풍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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