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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설명
  • 내 사랑은 불온한 검은 피 수록, 허연 著 내가 앉은 2층 창으로 지하철 공사 5-24 공구 건설 현장이 보였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몰인격한 내가 몰인격한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당신을 테두리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 칠월 불온한 검은 피 수록, 허연 著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 모음집

    칠월_허연 NEW

    20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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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국 파랑의 파란 수록, 이강하 著 다시 핀 꽃이 화사하게 보이는 날이면 나비는 극도로 흥분을 한다 그 감정은 물의 발아 무아지경인 음악처럼 첫사랑의 음률처럼 또각또각 검정구두 신고 빙글빙글 돈다 태풍에서 살아남은 꽃잎은 강하다 그때의 사랑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너무 가난해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새가 지저귈 때마다 다른 각도로 물의 일부가 된다 사건과 소문이 난무하는 시대 태양의 둘레는 과연 그대로일까 문제가 된 구름들은 지금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물의 기억이 생생하기를 어떤 순간엔 확, 내던지고 싶은 황당한 말들이 자꾸 차오른다 구석구석 펴지면서 쿨렁거리는 태양의 골짜기로 나의 미래가 올라가고 나의 미래는 내려가고 잊고 있었던 이름들이 피어나고 이해할 수 없는 나라는 계속 돌아가고

  •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 김이듬 著 이건 내가 쓴 시가 아니에요 대충 만년필로 휘갈긴 것도 있고 침 묻힌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빨간 밑줄을 그은 것도 있네요 나는 안경을 쓰고 세심하게 윤문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 때문에 제멋대로 몇 자 넣을 때도 있어요 간혹 자기소개서 대행업체 직원같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을 때도 있답니다 이 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난 혼자 피크닉 떠났어요 바위에서 물이 쏟아지고 죽은 새의 깃털이 펄럭일 때 숲 속의 가지 끝에서 누군가 웁니다 리본을 풀고 붉은 책을 펼칩니다 나는 당신을 만집니다 뺨의 체온 머리칼의 감촉 나는 당신을 다 꺼내놓을 수 없습니다 시럽에 빠트린 크랙커를 건지듯 따듯한 물속의 쿠키를 꺼내듯 단지 나는 당신을 가지고 만든 책을 봅니다 당신은 키스로 봉한..

  • 그래서 김소연 著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 아이에게 안미옥 著 모았던 손을 풀었다 이제는 기도하지 않는다 화병이 굳어 있다 예쁜 꽃은 꽂아두지 않는다 멈춰 있는 상태가 오래 지속될 때의 마음을 조금 알고 있다 맞물리지 않는 유리병과 뚜껑을 두 손에 쥐고서 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너의 등을 두드리면서 부서진다 밤은 희미하게 새의 얼굴을 하고 앉아 창 안을 보고 있다 노래하듯 말하면 더듬지 않을 수 있다 안이 더 밝아 보인다 자주 꾸는 악몽은 어제 있었던 일 같고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물에 번지는 이름 살아 있자고 했다

  • 긴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안다 배은미 著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 때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쳤을 때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하도 서러워 꼬박 며칠 밤을 가슴 쓸어내리며 울어야 했을 때 그래도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살고 싶었을 때 어디로든 떠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 집시처럼 허공에 발을 내딛은 지난 몇 달 동안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사람이 없었으며 사랑받고 싶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했으며 필요한 누군가가 나의 사랑이어야 했다 그립다는 것이 그래서 아프다는 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을 혼자가 되고부터 알았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노라 그 모질게 내뱉은 말조차 이제는 자신이 없다 긴 아픔을 가진 사람은 안다 그나마 사랑했기에 그렇게라..

  • 효에게. 2002. 겨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 차오르기만 할 줄 알았나 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

  •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수록, 허연 著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 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 비밀 노트 배수연 著 나 조금 죽으면 안 될까 조금 얼어 있으면 될까 잠드는 건 싫고 조금 죽으면 안 될까 잠자는 모습 전혀 무섭지 않으니까 나 조금 죽으면 안 될까 조금 멎을 수 있을까 기절하는 건 싫고 갈비뼈를 너무 심하게 누르진 말아 줘 모두들 놀라 눈이 커지겠지 나 무서워 보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안 하면서 거짓말처럼 보일 수 있을까 곰이라고 거짓말하는 곰 인형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

  • 소금사막에 뜨는 별 다정한 호칭 수록, 이은규 著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 꿈꿔야 할 문장은 잠언이 아닌, 모래바람을 향해 눈뜰 수 있는 한 줄 선언이어야 할 것 사막 쪽으로 비껴 부는 바람 꿈으로도 꿈꾸던 달의 계곡 지나 이국의 마을 바다에서 솟아오른 사막이 있다 당신은 물을까, 왜 소금사막이어야 하는지 만약 그리움이라는 지명이 있다면 비 내린 소금사막에 비치는 구름 근처일 것이다 끝없이 피어올라도 다시 피어오를 만큼의 기억을 간직한 구름 빗물 고인 소금사막에 떠 있는 기억의 신기루 그 풍경을 손에 담으면 구름을 간직할 수 있을까 간직을 꿈꾸게 하는 이름들 구름과 당신이 같은 종족임을 말하지 않겠다 소금사막에 밤이 오면 별, 하늘을 찢고 나온 고통 한 점 노래 쏟아지는 별빛에 살갗이 아플까..

  • 1226456 6 수록, 성동혁 著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네가 아침잠에서 깨어 방문을 열었을 때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별들 난 그 별을 함께 주워 담거나 그 별에 상처 난 너의 팔을 잡아 주고 싶었다 지나 보면 역시나 난 할 줄 아는 게 없었는데 너에겐 특히나 그랬다 조용히 밥을 먹는 너보다 더 조용히 밥을 먹으며 너를 고요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의 고요한 아이야, 가끔은 시끄럽게 너와 선루프를 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적이 찾아올 때 벌거벗은 나의 등을 안아 주던 게 생각난다 너는 작고 나는 포근했다 우린 오래오래 안녕이지만 오래오래 사랑한 기분이 든다 네 머리를 쓰다듬고 강에 뛰어들고 싶다 오래오래 허우적거리며 손의 감촉을 버리고 싶다 한 행성이 내게 멀어져 간 것은 재앙이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