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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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설명
  • 이것이 우리의 끝이 아니야 이제니 著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 밀려날 때 저 밑바닥으로부터 번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어둠으로 몰려갈 때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말한다.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으로 살아남아 오래 전 그 해변을 걷고 있다. 그 옛날의 우리로서 오늘의 이 해변을 걷고 있다. 누군가의 손이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테고. 누군가의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렸을 테고. 누군가의 눈이 누군가의 눈을 지웠을 테고. 누군가의 말이 누군가의 말을 뒤덮을 테고. 노을은 우리의 뒤쪽에서부터 서서히 몰려왔고. 서서히 물들였고. 서서히 물러났고.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보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마치 죽..

  • 당신이 빛이라면 中 백가희 내팽개칠 수 없는 손길이었고, 날 지독히 따라오는 달빛이었고, 등질 수 없는 햇빛이었어. 최대치의 행운이 너였고 최고치의 불행은 너의 부재였어. 사랑해. 오늘까지만 말하는 거야. 내일부터 나는 또 자연스럽게 징크스로 괴롭고 행운의 부적이 없어 벌벌 떨 게 분명하지만 드디어 너 없이 살겠다는 거야. 단 한 번도 나의 불행에 너를 이입한 적은 없어. 네가 없는 현실을 슬퍼했지. 근데 지금 내가 이렇게 슬픈 건 오로지 너 때문이야. 하나만 기억해 줘. 널 많이 사랑해서 믿었고, 그래서 빠졌고, 그래서 헤어나오지 못한 거야. 그리고 지금은 네가 날 택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널 버리는 거야. 잘 가. 이게 내 첫 이별 선고야. 어떤 말로도 채울 수 없는 나의 너. 오늘까지 너를 사랑..

  • 물의 호흡을 향해 나선의 감각 수록, 이제니 著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본다라고 하자 희고 마른 뼈의 적막을 듣는다고 하자 심해의 어원을 찾아 깊이 깊이 떠돈다고 하자 물결의 적막을 적막의 불길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나아가는 동시에 멈추는 나뭇가지 번역 투의 문장만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하자 뼈로 만든 악기가 울고 있구나 물결 속에서 물결을 향해 물결이 되어 물결로서 물의 호흡을 항해한다고 하자 물의 호흡을 향해 간다고 하자 회색이라는 말을 똑같은 호흡으로 기록한다고 하자 호흡이 은유의 뼈를 만지다 사라진다고 하자 그곳이라는 말에 어제의 동공이 열린다고 하자 노래를 숨겨온 너의 입술이 내일의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 그렇다 빛을 보는 내가 있다라고 하자 어둠에 둘러싸여 어둠으로 말하는 내가 있다..

  • 너의 우울이 길다 황경민 著 너의 우울이 길다 후회가, 체념이, 무기력이 너무 길다 보아라! 큰 바람이 불었고 세계는 그대로가 아니냐? 네 안에서 부는 바람에 너는 너무 오래 흔들린다

  • 이름 없는 애인에게 한상현 著 약속해. 새하얗게 지새는 밤을 새까맣게 잊어버릴 저 아침까지 나는 얌전히 허물어질게. 오늘 밤 저 달빛이 어디에 떨어지든지 새푸른 그 자리 찾아가 내 전부를 쩔그렁 던져둘게. 새벽이 오기 전에 뿌리내리고, 형편없이 일렁이는 그리움 차게 식혀 온몸을 적시고 새하얀 네 손이 나를 온통 헤집어 볼 때까지 영양 무해한 여름으로 남아있을게. 비처럼 찾아올 너 하나 기다리며 천천히 살아있을게. 안녕.

  • 너에게 서혜진 著 내려놓으면 된다 구태여 네 마음을 괴롭히지 말거라 부는 바람이 예뻐 그 눈부심에 웃던 네가 아니었니 받아들이면 된다 지는 해를 깨우려 노력하지 말거라 너는 달빛에 더 아름답다

  • 밤의 공벌레 아마도 아프리카 수록, 이제니 著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

  • 첫눈이 온다구요? 황경신 著 첫눈이 온다는데 우린 어디서 만날까요. 아뇨, 나는 가지 못하니 당신이 오세요. 알잖아요, 나는 당신에게 가는 길을 잊어버렸어요. 첫눈이 온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올 건가요. 아뇨, 버스도 전철도 안 돼요. 걸어오거나 날아오지도 마세요. 당신은 그냥 밤으로 오세요. 꿈으로 오세요. 눈길에 발자국 하나, 얼룩 하나 남기지 말고 내가 왔어요, 소리도 내지 말고. 그래야 내가 모르죠. 당신이 온 것도 모르고. 어느새 가버린 것도 모르고. 떠나는 사람이 없어야 남는 사람도 없죠. 행복이 없어야 슬픔도 없죠. 만남이 없어야 이별도 없죠. 첫눈이 온다는 날 기다림이 없어야 실망도 없죠. 사랑이 없어야 희망도 없죠. 잠시 왔다가 가는 밤처럼 잠시 잠겼다 깨어나는 꿈처럼 그렇게 오세요. 그렇..

  • 명왕성에서 온 편지 장이지 著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 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

  • 블랭크 하치 아마도 아프리카 수록, 이제니 著 블랭크 하치. 내 불면의 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면 너도 네 얼굴을 보여줄까. 나는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썼다 모든 것을.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이미 벌써. 너는 공백으로만 기록된다. 너에 대한 문장들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때 너는 또다시 한줌의 모래알을 흩날리며 떠나는 흰빛의 히치하이커. 소리와 형태가 사라지는 소실점 너머 네 시원을 찾아 끝없이 나아가는 블랭크 하치. 언제쯤 너에게 가 닿을까. 언제쯤 목마름 없이 너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공백 여백 고백 방백. 네가 나의 눈을 태양이라고 불러준 이후로 나는 그늘에서 나왔지. 태양의 눈은 마흔다섯 개. 내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날들로부터 아홉 시간 뒤였다. 이후로 나는 타인의 눈을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