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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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를 강정 著 잊지 마세요 더 많은 걸 잊어야 할 때가 올 거예요 그대 기억 속에 피는 꽃이라고 말하진 마세요 더 크고 넓은 꽃잎들을 그대는 잊어야 할 거예요 난 그대에게 줄 게 없었어요 피도 눈물도 내 것은 하나도 없는 몸뚱이를 그대가 가졌으면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요 유일한 그대 사랑이고 싶었던 날, 없는 우주와 없는 바닷속에서 숨쉬려는 그대는 찾고 싶지 않았겠지요 세상 어디에도 나는 없어요 그대가 내 속에서 달아나버리니 내가 또 있겠네요 없는 세상이 정말로 없어져버렸으니까요 다시 올 거라고 믿어요 오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새들이 아침마다 내 방 창틀에 붙매여 우는데 무어라 답해드릴까요? 지난밤 악몽 속에서도 그대는 멀쩡히 아침 출근을 하고 나는 다시 악몽의 꿀단지 속에 빠져들어요 깨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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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著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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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주행 배수연 著 거대한 수사슴을 치었어요 입을 벌리면 잉크가 쏟아지는 밤이었고 내 영국산 지프 앞에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는 큰 뿔 사슴이 있었어요 나는 사슴이 넘을 수도 태울 수도 없어 어느새 한 시간째 경적만 울렸어요 사슴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해요 제발 그만,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거야 왜 내 앞으로 뛰어든 거야? 사슴의 터진 몸에서 나오는 빛나는 주홍 알갱이들 그건 껍질이 벗겨진 귤의 살처럼 쓰러진 채 물을 흘렸고 나는 뒷좌석에서 얼굴을 싸매고 밤을 새웠어요 고개를 숙일수록 차오르는 주홍 강물 이 밤이 지나면 우린 달리는 것과 흐르는 것들의 목적지에 닿을 거야 그곳에선 너와 나의 이름을 말하는 이도 부르는 이도 없겠지만 태양 아래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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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풀잎 노래로 가는 배 수록, 유경환 著 마른 풀잎 속엔 엽맥(葉脈)의 질긴 기도가 남아 있다. 끊기지 않던 가녀린 목숨 소리 하늘에 내뿜던 숨 멈춘 채 멈춘 그대로 버리지 못한 소망을 아름답게 날려 가며, 세우던 고개는 떨어뜨렸으나 짙푸름으로 적시던 기다림 당신의 뜻에 발돋움하자던 춤, 그 몸짓을 모르리라. 바람에 시달리고 짐승에 밟혔어도 어떻게 지금부터 시야에서 사라지는가를 하늘이 하얗게 흙을 덮어 내리면 알리라. 끝바람에 몸 부서져 바서지는 것도 온몸 소리내며 태우는 불꽃 와 주지 않아도 닿지 않아도 들판 가득히 일어서는 영혼과 그리고 어딘가에 묻혀 거름이 되는 것 봄으로 미루는 부활을 마른 풀잎 속엔 기억해야 할 기도가 남아 있음을 당신 한 분이라도 당신 한 분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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