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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음집 165

카테고리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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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허수경 著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

  • 1226456 6 수록, 성동혁 著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네가 아침잠에서 깨어 방문을 열었을 때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별들 난 그 별을 함께 주워 담거나 그 별에 상처 난 너의 팔을 잡아 주고 싶었다 지나 보면 역시나 난 할 줄 아는 게 없었는데 너에겐 특히나 그랬다 조용히 밥을 먹는 너보다 더 조용히 밥을 먹으며 너를 고요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의 고요한 아이야, 가끔은 시끄럽게 너와 선루프를 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적이 찾아올 때 벌거벗은 나의 등을 안아 주던 게 생각난다 너는 작고 나는 포근했다 우린 오래오래 안녕이지만 오래오래 사랑한 기분이 든다 네 머리를 쓰다듬고 강에 뛰어들고 싶다 오래오래 허우적거리며 손의 감촉을 버리고 싶다 한 행성이 내게 멀어져 간 것은 재앙이다 네..

  • 착각 당신이 빛이라면 수록, 백가희 著 너를 사랑한 이후부턴 세상이 내가 어디까지 나약해질 수 있을까 하는 실험 중 같다 한 사람으로 이렇게 휘청이기도 했다 세상의 전체가 당신으로 보이기도 했다 첫사랑이었다

  • 울고 있는 사람 이제니 著 우울을 꽃다발처럼 엮어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땅만 보고 걷는 사람입니다. 왜 그늘로 그늘로만 다니느냐고 묻지 않았다. 꽃이 가득한 정원 한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성마른 말이 너를 슬프게 하는구나. 누군가의 섣부른 생각이 너를 슬프게 하는구나. 갇혔다고 닫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밖으로 밖으로 나가세요. 산으로 들으로. 강으로 바다로. 너를 품어주는 것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세요. 그렇게 걷고 걷고 걷다 다시 본래의 깊은 자기자신으로 돌아오세요. 그러니 너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구나. 갈 곳이 없어 갈 곳이 없는 사람인 채로. 구석진 곳을 찾아 혼자서 울고 있구나.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구나.

  • 이것이 우리의 끝이 아니야 이제니 著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 밀려날 때 저 밑바닥으로부터 번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어둠으로 몰려갈 때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말한다.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으로 살아남아 오래 전 그 해변을 걷고 있다. 그 옛날의 우리로서 오늘의 이 해변을 걷고 있다. 누군가의 손이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테고. 누군가의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렸을 테고. 누군가의 눈이 누군가의 눈을 지웠을 테고. 누군가의 말이 누군가의 말을 뒤덮을 테고. 노을은 우리의 뒤쪽에서부터 서서히 몰려왔고. 서서히 물들였고. 서서히 물러났고.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보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마치 죽..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 박준 著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 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건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당신이 빛이라면 中 백가희 내팽개칠 수 없는 손길이었고, 날 지독히 따라오는 달빛이었고, 등질 수 없는 햇빛이었어. 최대치의 행운이 너였고 최고치의 불행은 너의 부재였어. 사랑해. 오늘까지만 말하는 거야. 내일부터 나는 또 자연스럽게 징크스로 괴롭고 행운의 부적이 없어 벌벌 떨 게 분명하지만 드디어 너 없이 살겠다는 거야. 단 한 번도 나의 불행에 너를 이입한 적은 없어. 네가 없는 현실을 슬퍼했지. 근데 지금 내가 이렇게 슬픈 건 오로지 너 때문이야. 하나만 기억해 줘. 널 많이 사랑해서 믿었고, 그래서 빠졌고, 그래서 헤어나오지 못한 거야. 그리고 지금은 네가 날 택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널 버리는 거야. 잘 가. 이게 내 첫 이별 선고야. 어떤 말로도 채울 수 없는 나의 너. 오늘까지 너를 사랑..

  • 물의 호흡을 향해 나선의 감각 수록, 이제니 著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본다라고 하자 희고 마른 뼈의 적막을 듣는다고 하자 심해의 어원을 찾아 깊이 깊이 떠돈다고 하자 물결의 적막을 적막의 불길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나아가는 동시에 멈추는 나뭇가지 번역 투의 문장만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하자 뼈로 만든 악기가 울고 있구나 물결 속에서 물결을 향해 물결이 되어 물결로서 물의 호흡을 항해한다고 하자 물의 호흡을 향해 간다고 하자 회색이라는 말을 똑같은 호흡으로 기록한다고 하자 호흡이 은유의 뼈를 만지다 사라진다고 하자 그곳이라는 말에 어제의 동공이 열린다고 하자 노래를 숨겨온 너의 입술이 내일의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 그렇다 빛을 보는 내가 있다라고 하자 어둠에 둘러싸여 어둠으로 말하는 내가 있다..

  • 너의 우울이 길다 황경민 著 너의 우울이 길다 후회가, 체념이, 무기력이 너무 길다 보아라! 큰 바람이 불었고 세계는 그대로가 아니냐? 네 안에서 부는 바람에 너는 너무 오래 흔들린다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著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 이름 없는 애인에게 한상현 著 약속해. 새하얗게 지새는 밤을 새까맣게 잊어버릴 저 아침까지 나는 얌전히 허물어질게. 오늘 밤 저 달빛이 어디에 떨어지든지 새푸른 그 자리 찾아가 내 전부를 쩔그렁 던져둘게. 새벽이 오기 전에 뿌리내리고, 형편없이 일렁이는 그리움 차게 식혀 온몸을 적시고 새하얀 네 손이 나를 온통 헤집어 볼 때까지 영양 무해한 여름으로 남아있을게. 비처럼 찾아올 너 하나 기다리며 천천히 살아있을게. 안녕.

  •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영원한 귓속말 수록, 이승희 著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