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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거운 편지 황경신 著 편지를 쓸까 했어요 무슨 말로 시작할까 생각했어요 생각을 하다보니 해야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말도 없었어요 난 잘 지내기도 하고 못 지내기도 해요, 라는 말도 웃기죠 아무 내용도 없잖아요 잘 지내요? 라는 질문도 이상하죠 못 지낸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잘 지내세요. 도 그래요 사실 난 당신이 좀 못 지내면 좋겠거든요 하지만 그런 소릴 할 수는 없죠 난 잘못한 것도 없이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렸고 이제 와서 그걸 바로잡을 수도 없는데 마음이 어떻든 뭐가 바뀌겠어요 잔인하죠? 이게 우리의 미래였어요.

  • 빈티지인 이유 임지은 著 슬픔이 빈티지인 이유를 말해준다니까 너는 외국 도시 이름 같다고 한다 외국에서는 슬픔도 머플러가 될 수 있다고 한겨울 목에 두르면 부러운 나머지 북극곰이 찾아올 수도 있겠다고 ​ 슬픔이 빈티지인 이유를 말해준다니까 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겨울이 취미인 그들은 체크무늬 장갑을 샀고 하나씩 나눠 낀 채 동물원을 빠져나갔다고 내 손 위에 너의 손을 포갠다 ​ 우리가 슬픔을 숨기지 않고 가꿀 수 있다면 창틀 위에 쌓인 눈 눈이 가득히 덮인 숲 그 흰색에 가까운 따듯함으로 서로를 쓰다음었을 텐데 ​ 우리는 등이 간지러운 북극곰처럼 마주 앉아서 빈티지를 말한다 겨울이 녹고 있으니까 슬프고 기르던 개를 만날 수 없어 슬프다 오래된 것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 슬픔이 빈티지인 이..

  • 주동자 김소연 著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여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 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아버린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눈물이라는 뼈 수록, 김소연 著 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습니다 너는 내 귀에다 대고 거짓말 좀 잘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듯 거짓말 덕분에 이 우주는 겨우 응석을 멈춥니다 어지럽습니다 체한 걸까요 손을 넣어 토하려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여긴 왜 이렇게 추..

  • 口 성동혁 著 당신이 날 재앙으로 인정한 날부터 언덕마다 달이 자라났네 슬리퍼는 낙엽을 모방하며 흩어지고 모이고 계절은 용서까지 치달았다 창세기를 여러 번 읽어도 나는 가위에 눌렸다 난간에 심은 바람에 대해 변명하지 못했다 신앙과 종말을 함께 배워 불안하진 않았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나오는 허밍은 나의 궤도이다 입을 닫아야 들리는 곡선 죄가 유연하고 둥그렇다 달이 찰 때마다 미안한 것들이 생긴다 죄를 앓고 난 뒤 쿨럭쿨럭 보라색으로 자란 바람이 살 나간 우산 안의 그림자를 밀쳐 내고 몸을 디밀며 안녕? 당신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종량제 봉투 안에 가득 찬 악몽을 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인사를 할 수 있도록 새벽 기도를 나가지 않고도 자라난 달을 버릴 수 있도록 동글네모스름한 초인종을 달고

    시 모음집

    口_성동혁 NEW

    202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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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을 위한 헌시 정규화 著 바라보면 꽃이었고 돌아서면 그리움이었다 나는 왜 그 짓을 못했을까, 꺾어들면 시든 다음에도 나의 꽃인 것을

  • 무정한 신 정한아 著 이 사막은 흐른다 어제의 유희가 오늘은 비수다 석양에 물든 모래를 두 손 가득 담아들면 붉은 태양빛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모래알 밑에 새겨진 그대의 이름은 밟고 나는 지평선으로 간다 보라, 어둠이다 공평무사하신 어둠의 신이 저 멀리서 옷자락을 끌고 걸어오신다 내 두 눈을 지워주소서 창공의 별들을 탐하지 않도록 세상의 모든 빛이 나를 찌르나이다 그러나 신은 무정(無情)하므로 나의 기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래알처럼 그대의 이름은 무수히 빛났다 흐르는 사막에서는 별들도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눈꺼풀에 새겨진 그대의 이름을 깜빡이며 나는 지평선으로 간다 보라, 어둠이다 공평무사하신 무정한 어둠의 신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그분이 시간의 옷자락을 끌고 걸어오신다 발바닥이 까맣다

  • 가시를 위하여 김선재 著 통증을 용서해요 부분이면서 어느덧 전체가 된 나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이. 날을 세운 날은 아니지만 나이면서 당신이고, 당신이지만 나인 시간을 견뎌요 나는 기원에서 멀어졌다 이미 나는 숲의 변형이며 혹은 바다의 변종이다 형식에서 멀어져 속도 없고 겉도 없는 어떤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사라진 내용이지만, 여전히 전체를 제압한다 형식을 제압한다 나는 혀의 어순이다 돌기들 사이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하나의 돌기는 혀일까 바늘일까 미각은 우리의 옛 성질이었으나 지금 너는, 나는 혀인지 바늘인지, 짠맛인지 쓴맛인지 수시로 아픔을 확인하는 너인지 나인지 같은 온도를 갖기 이전에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러니 제 분을 못 이긴 팔매질을 용서해요 때로..

  • 물속 깊이 꽃들은 피어나고 강은진 著 나는 너의 말로 말을 하고 너의 얼굴로 잠든다 내일, 이라고 적힌 글자들을 삼키며 물속 깊이 꽃들은 피어나고 울지 않는 밤이 다시 찾아오다면 너의 흙 묻은 신발을 오래오래 껴안고 있을 거야 어린 감나무를 심어 놓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연하디연한 살갗에 뺨을 대며 붉은 열매들이 나비처럼 꿈꾸는 상상을 할 거야 나는 너의 손으로 꿀벌의 투명한 날개를 쓰다듬고 너의 생채기로 선혈을 흘린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고요 속에서 아마 나는 네가 붙잡았을 최후의 기억 그때 웃고 있었다고 믿을 거야 분명히 그랬다고 믿을 거야 봄은 바싹 마른 입술처럼 바스락거렸지만 살아있는 것들 중 침수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나는 가을에 태어났고 네가 없는 날 죽었다

  • 다정함의 세계 김행숙 著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 안부 윤진화 著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세계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읊조립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 속에 가득한 혁명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당신에게 답장을 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 나도 당신처럼 시詩를 섬기며 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부끄럽지 않게 봄을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 목숨의 노래 문정희 著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