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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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설명
  • 붉은 체념 박연준 著 다리가 생겼어 소리가 사라졌어 사랑을 영영 잃었으니 평생 손끝으로 말해야 해 물거품이나 될 걸 그랬지

  • 나는, 그대를 강정 著 잊지 마세요 더 많은 걸 잊어야 할 때가 올 거예요 그대 기억 속에 피는 꽃이라고 말하진 마세요 더 크고 넓은 꽃잎들을 그대는 잊어야 할 거예요 난 그대에게 줄 게 없었어요 피도 눈물도 내 것은 하나도 없는 몸뚱이를 그대가 가졌으면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요 유일한 그대 사랑이고 싶었던 날, 없는 우주와 없는 바닷속에서 숨쉬려는 그대는 찾고 싶지 않았겠지요 세상 어디에도 나는 없어요 그대가 내 속에서 달아나버리니 내가 또 있겠네요 없는 세상이 정말로 없어져버렸으니까요 다시 올 거라고 믿어요 오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새들이 아침마다 내 방 창틀에 붙매여 우는데 무어라 답해드릴까요? 지난밤 악몽 속에서도 그대는 멀쩡히 아침 출근을 하고 나는 다시 악몽의 꿀단지 속에 빠져들어요 깨어나..

  • 청춘 황경신 著 내 잔에 넘쳐흐르던 시간은 언제나 절망과 비례했지 거짓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마음은 늘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어 이제 겨우 내 모습이 바로 보이는데 너는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한다 가려거든 인사도 말고 가야지 잡는다고 잡힐 것도 아니면서 슬픔으로 가득 찬 이름이라 해도 세월은 너를 추억하고 경배하리니 너는 또 어디로 흘러가서 누구의 눈을 멀게 할 것인가

  • 그해 봄에 박준 著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 키 유안진 著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이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시 모음집

    키_유안진 NEW

    202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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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시차 최영미 著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 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面壁)한 두 세상.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著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자살 류시화 著 눈을 깜빡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

  • 야간 주행 배수연 著 거대한 수사슴을 치었어요 입을 벌리면 잉크가 쏟아지는 밤이었고 내 영국산 지프 앞에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는 큰 뿔 사슴이 있었어요 나는 사슴이 넘을 수도 태울 수도 없어 어느새 한 시간째 경적만 울렸어요 사슴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해요 제발 그만,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거야 왜 내 앞으로 뛰어든 거야? 사슴의 터진 몸에서 나오는 빛나는 주홍 알갱이들 그건 껍질이 벗겨진 귤의 살처럼 쓰러진 채 물을 흘렸고 나는 뒷좌석에서 얼굴을 싸매고 밤을 새웠어요 고개를 숙일수록 차오르는 주홍 강물 이 밤이 지나면 우린 달리는 것과 흐르는 것들의 목적지에 닿을 거야 그곳에선 너와 나의 이름을 말하는 이도 부르는 이도 없겠지만 태양 아래에 서서..

  • 마른 풀잎 노래로 가는 배 수록, 유경환 著 마른 풀잎 속엔 엽맥(葉脈)의 질긴 기도가 남아 있다. 끊기지 않던 가녀린 목숨 소리 하늘에 내뿜던 숨 멈춘 채 멈춘 그대로 버리지 못한 소망을 아름답게 날려 가며, 세우던 고개는 떨어뜨렸으나 짙푸름으로 적시던 기다림 당신의 뜻에 발돋움하자던 춤, 그 몸짓을 모르리라. 바람에 시달리고 짐승에 밟혔어도 어떻게 지금부터 시야에서 사라지는가를 하늘이 하얗게 흙을 덮어 내리면 알리라. 끝바람에 몸 부서져 바서지는 것도 온몸 소리내며 태우는 불꽃 와 주지 않아도 닿지 않아도 들판 가득히 일어서는 영혼과 그리고 어딘가에 묻혀 거름이 되는 것 봄으로 미루는 부활을 마른 풀잎 속엔 기억해야 할 기도가 남아 있음을 당신 한 분이라도 당신 한 분이라도.

  • 체크 메이트 손미 著 어제는 있었는데 오늘은 없네. 라이터를 켤 때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을. 맨발로 도망가는 여자는 초식동물 눈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중이네. 나는 자주 죽었는데 컷, 눈 뜨면 이곳은 총구 속 힘을 풀고 발사되는 순간, 어제인지 오늘인지 하루가 사라지네. 바라보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람인 채 외투에 팔을 넣다가 막 부화하는 알로 변하기도 했지. 컷, 이렇게 매일 나를 살해하는 건 누구인가? 컷, 눈을 뜨면 당나귀 새끼. 세 번 깜빡이기 전에 죽어 버리는 그리고 다시 컷. 함께였는데 지금은 사라진, 사라진 사람들

  • 첫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수록, 류시화 著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