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錄
카테고리
작성일
2022. 8. 8. 09:45
작성자
Verliebt

야간 주행
                                                                                                       배수연 著


거대한 수사슴을 치었어요

입을 벌리면 잉크가 쏟아지는 밤이었고
내 영국산 지프 앞에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는 큰 뿔 사슴이 있었어요
나는 사슴이 넘을 수도 태울 수도 없어 어느새 한 시간째 경적만 울렸어요
사슴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해요
제발 그만,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거야
왜 내 앞으로 뛰어든 거야?

사슴의 터진 몸에서 나오는 빛나는 주홍 알갱이들
그건 껍질이 벗겨진 귤의 살처럼 쓰러진 채 물을 흘렸고
나는 뒷좌석에서 얼굴을 싸매고 밤을 새웠어요
고개를 숙일수록 차오르는 주홍 강물

이 밤이 지나면
우린 달리는 것과 흐르는 것들의 목적지에 닿을 거야
그곳에선 너와 나의 이름을 말하는 이도 부르는 이도 없겠지만
태양 아래에 서서
나는 너의 무늬들을 기억하고 하나하나 불러줄게
우리들의 그림자는 착한 방향으로
눈썹을 가지런히 정련하고 있을 거야

'시 모음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살_류시화  (0) 2022.08.08
오늘의 일기_김박은경  (0) 2022.08.08
너무 오래 되었다_박서영  (0) 2022.08.08
아득한 한 뼘_권대웅  (0) 2022.08.05
호모 루아_나희덕  (0) 2022.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