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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음집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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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시를 올립니다.
  • 긴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안다 배은미 著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 때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쳤을 때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하도 서러워 꼬박 며칠 밤을 가슴 쓸어내리며 울어야 했을 때 그래도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살고 싶었을 때 어디로든 떠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 집시처럼 허공에 발을 내딛은 지난 몇 달 동안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사람이 없었으며 사랑받고 싶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했으며 필요한 누군가가 나의 사랑이어야 했다 그립다는 것이 그래서 아프다는 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을 혼자가 되고부터 알았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노라 그 모질게 내뱉은 말조차 이제는 자신이 없다 긴 아픔을 가진 사람은 안다 그나마 사랑했기에 그렇게라..

  • 서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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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시_한강 NEW

    2022.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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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에게. 2002. 겨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 차오르기만 할 줄 알았나 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

  • 조용한 날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 가을, 그리고 겨울 최하림 著 깊은 가을 길로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집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 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세석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음으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

  • 새벽에 들은 노래 3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 해부극장 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 *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 나에게 심장이 있다,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 라고 견디며 말한다 일 초마다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것, 일 초마다 한 주먹씩 더운 피를 뿜어내는 것이 있다 * 수년 전 접질렀던 발목에 새로 염증이 생겨 걸음마다 조용히..

  • 서울의 겨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네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네가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 피 흐르는 눈 3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해서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란 말이 어슴푸레 및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 저녁의 대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해가 지고 밤이 검고 검어져 다시 푸르러질 때까지 혀를 적실 거야 냄새 맡을 거야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 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나직이, 더없이. 더없이 부드럽게. 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 내 무릎에 깃들어 잠들 때까지.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 검푸른 그림자

  • 장마 ㅡ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수록, 박준 著 그곳의 아이들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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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_박준 NEW

    202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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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수록, 허연 著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 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