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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음집 165

카테고리 설명
좋아하는 시를 올립니다.
  • 비유법 이규리 著 방과후 날마다 비유법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때엔 방과후가 있었고 비유법을 밥처럼 먹던 시절 있었다 비유는 하나로 여럿을 사는 일이야 노을이 철철 흘러 뜨거워져 닫아거는 저녁 우리는 서쪽 강당에 앉아 흰 단어들을 널었다 나뭇가지에 서늘한 시간이 척척 걸리곤 했다 그 놀이를 도시락처럼 까먹는 동안 놀이 끝에 쏴한 기운이 배어나고 있었다 이런 게 슬픔이야. 난 슬픔을 알아. 그 찬란에 눈이 베이며 살며 또 견디며 그런데 그때 선생님들은 다 어디 갔을까 비유법을 모르는 추운 꽃밭, 죽어가는 나무, 무서운 옥상들 뭐 이런 시절이 다 있어 이건 비유가 아닌데 방과후가 아닌데 제 생이 통째 비유인 걸 모르는 채 혼자 난간을 미는 붉은 해

  • 수몰지구 전윤호 著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 흘러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 무화과 숲 황인찬 著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빈 병 김재진 著 그 무엇에라도 절실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단 한 번만이라도 모든 것 다 바쳐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비 그친 뒤 쏟아내는 나무 향기에 숨막혀 질식해 죽을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꽃 보기 위해 왔다 가는 가을햇볕처럼 파리하고 텅 비어 있는 세월 시드는 것들이 싫어 화병에 아무 것도 꽂지 않는다

  • 당분간 당신의 아름다움 수록, 조용미 著 지루하고 괴로운 삶이 지속된다 집요하게 너는 생의 괴로움에 집중하고 있다 생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미혹당했던 적 있었다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손등에 바로 쏟아지듯 고통과 환희를 느끼며 펄펄 뛰었다 여긴 생이라는 현장이다 이렇게 생생하므로 다른 곳일 수 없다 무서운 집중 앞에 미망과 무명이 사나운 개의 이빨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뒤로 물러나기를 바란다 통쾌하다 비명을 지를수록 생은 더욱 싱싱해지고, 생생해지고 지루한 열정이 나를 지치게 한다 이 괴로움은 완벽하게 독자적이고 완벽하게 물질적이다 누구나 완벽하게 평화롭기는 어렵다 그래도 생의 괴로움에만 집중하는 순교자가 되고 싶다 아름답고 끔찍한 삶이 당분간 지속된다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著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스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우주의 저수지 신영목 著 문득 눈을 감자 눈에서 잘려나간 시선이 목도리처럼 날아갔다 사랑해,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있다 외진 저수지가 그 처음을 허구 중에 던질 때의 그 허구 행성의 눈물샘이 행성의 조각 하나를 가라앉게 하는 일이 우주의 저녁이다 나로부터 나에까지 끝없이 달아나는 가운데 너 너로부터 너에까지 끝없이 쫓아가는 가운데 나 행성의 조각 하나가 행성의 눈물샘을 반짝이게 하는 일이 우주의 아침이다 너는 그때까지 있다 외진 저수지가 그 끝을 맹세 중에 띄울 때 그 맹세 문득 눈을 뜨자 눈으로 뛰어드는 시선이 목도리처럼 날아왔다 그만해, 그러나 놓아주지 않았다

  • 서바이벌 오은 著 우리 중 하나는 이제 떨어진다는 거죠?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만 중요했다 살다의 반대말은 죽다가 아니야 떨어지다지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누군가는 떨어졌다는 것이다 오늘부로 너는 우리에게서 이탈하게 된다 우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 감정은 수용성이라 떨어진 자는 떨어져서 울고 떨어지지 않은 자는 떨어지지 않아서 운다 편성표가 말한다 슬퍼할 시간을 딱 일주일 주겠다 그 사이 지난주에 네가 살아서 열광하던 사람들이 너를 집요하게 비난할지도 모른다 너는 갈수록 가볍고 희미해질 것이다 네가 없는데도 남은 자들은 우리를 만든다 취향은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비슷한 것이 하나 없는데도 살아남았으니까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함께 슬퍼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규모는 점점 작아진다 하나에 가..

  • 드라이아이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김경주 著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뺴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 백 년 동안의 고독 카니발 수록, 조동범 著 발견되지 않은 루트를 따라 고독이 발굴되었다. 얼음산을 오르던 자들의 시신은 놀라운 고독으로 가득했고, 고독의 외로움은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시신들은 저마다 침묵하며 고독했으므로 죽은 자들의 흐느낌은 침엽수림을 돌아보며 어느덧 사라졌다. 누구나 침묵했고 언제나 고독했다. 돌아서면 세상은 고독한 폭설로 가득했다. 고독이 발굴되었지만 고독한 낮과 밤을 앞에 두고 세계의 모든 폐허는 말을 아꼈다. 지상은 이내 고독으로 가득 찼으므로 고독도 발굴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고독한 세월을 견디는 동안 눈보라는 그저 단조롭게 쏟아졌다. 죽은 자들은 잊혀졌고 오래된 씨앗의 발아는 요원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고독이야말로 고독에 ..

  • 돌의 정원 안희연 著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나를 열고 여긴 더 이상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소매를 끌며 자꾸만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우리는 흰 울타리를 넘어 처음 보는 숲으로 갑니다 보통의 숲이었는데 나무들이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올려다보면 아주 긴 목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흰 종이 위를 맨발로 걸어가 본 적 있니 앞이 안 보이고 축축한 버섯들이 자랄 거야 거기 있어? 물으면 거기 없는 여름 우리는 아름답게 눈이 멀고 그제야 숲은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서 눈부신 정원을 꺼내주었던 것입니다 색색의 꽃들 아름다워 손대면 검게 굳어버리는 꽃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멀찌감치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니 거기서 무얼 하고 계세요 왜 그런 굴러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무심..

  • 이제 놀랍지 않다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수록, 정다연 著 내가 벌목공의 눈을 가졌다는 것 육식주의자라는 것 전쟁영화를 보며 평온한 잠이 쏟아진다는 것 자꾸만 침이 고인다는 것 재난 뉴스를 들으며 아침 햇살을 사랑한다는 것 흰 바지가 더러워지지 않는 오늘의 날씨를 좋아한다는 것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 어떠한 손목과도 무관하다는 것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너의 굶주림과 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 외투를 걸치며 털가죽이 벗겨진 채로 찬 바닥에서 식어가는 생명이 있다는 것 그것이 목숨일지라도 나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 원숭이의 심장을 적출해 돼지의 심장을 이식한 종족이 나라는 것 그것이 내 심장과 무관하다는 것 아프지 않다 이제 놀랍지 않다 그 무엇도,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