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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8. 3. 09:43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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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
                                                                                        김이듬 著


이건 내가 쓴 시가 아니에요

대충 만년필로 휘갈긴 것도 있고
침 묻힌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빨간 밑줄을 그은 것도 있네요

나는 안경을 쓰고 세심하게 윤문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 때문에 제멋대로 몇 자 넣을 때도 있어요
간혹 자기소개서 대행업체 직원같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을 때도 있답니다

이 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난 혼자 피크닉 떠났어요

바위에서 물이 쏟아지고 죽은 새의 깃털이 펄럭일 때
숲 속의 가지 끝에서 누군가 웁니다
리본을 풀고 붉은 책을 펼칩니다
나는 당신을 만집니다

뺨의 체온 머리칼의 감촉
나는 당신을 다 꺼내놓을 수 없습니다
시럽에 빠트린 크랙커를 건지듯
따듯한 물속의 쿠키를 꺼내듯
단지 나는 당신을 가지고 만든 책을 봅니다

당신은 키스로 봉한 편지처럼 오래된 노래
나를 봉하는데 실패한 사람
보석처럼 빛나는 유골
없는 발로 꾹꾹 눌러쓴 책
단지 나는 당신을 여과하고 퇴고하고
나와 상관없이 흐르는 당신 옮겨 적습니다

그러니 이 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침묵한 당신은 내 말의 시작
이 시의 끝이고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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