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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설명
  • 너는 또 봄일까 백희다 著 봄을 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름이 오면 잊을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너는 여름이었나 이러다 네가 가을도 닮아있을까 겁나 하얀 겨울에도 네가 있을까 두려워 다시 봄이 오면 너는 또 봄일까

  • 청춘 황경신 著 내 잔에 넘쳐흐르던 시간은 언제나 절망과 비례했지 거짓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마음은 늘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어 이제 겨우 내 모습이 바로 보이는데 너는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한다 가려거든 인사도 말고 가야지 잡는다고 잡힐 것도 아니면서 슬픔으로 가득 찬 이름이라 해도 세월은 너를 추억하고 경배하리니 너는 또 어디로 흘러가서 누구의 눈을 멀게 할 것인가

  • 그해 봄에 박준 著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 가만히 웃거나 울면서 최현우 著 누구는 사라지기 위해, 누구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쓴다고 했다. 아름답자고, 추악해지자고, 자유와 자유의 실패 속에서 자란다고도, 죽는다고도, 아무것도 아니라고도. 인간의 안쪽으로, 바깥쪽으로, 한 손에는 모래 한줌, 한 손에는 온 우주를 쥐고 똑바로 걸어가는 거라고도 했다. 꽃을 샀다가 서둘러 탄 막차 속에서 망가져버렸다. 차마 버리지 못했다. 등뒤로 감추고 돌아왔는데 이런 예쁜 꽃다발을 어디서 가져왔냐고 환하게 웃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아주 오래도록,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어떤 균형으로만 위태롭게 서서 만나게 되는 무언가. 찰나에 마주서서 가만히 웃거나 우는, 어쩌면 그게 내가 하는 전부와 하고 싶은 전부가 아닐까, 절반은 알고 절반은 모..

  • 테라스 남지은 著 난간에 선 존재는 자기를 망친 결벽을 떠올린다 아는 손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손으로부터 사랑하는 자로부터 사랑하지 않는 자로부터 일상의 머리채를 더듬더듬 건져올리기까지 사랑도 되고 폭력도 된다는 머리통을 깨부술 때까지 안도 되고 밖도 되는 곳이 있다 낮도 되고 밤도 되는 때가 있다 괜찮아? 춥지 않겠어? 다정한 물음이 있고 어떤 이야기를 계속하기 좋은 순간이 있다 조명이 어둡거나 테이블이 조금 흔들린대도 있잖아 하고 시작된 이야기가 그건 있잖아 하고 이어진다 옆 사람의 옷이 내 어깨에 걸리고 옆 사람의 말이 내 것처럼 들려서 옆 사람의 손에서 기울어진 찻잔같이 내 몸도 옆, 옆, 옆으로 기우뚱거리고 쏟아져도 괜찮아 낙관도 포기도 아닌 말이 마음에 닿기도 한다 난간에 기대어 자라던 식물들이..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著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게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키 유안진 著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이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시 모음집

    키_유안진 NEW

    202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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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노래 5 고은강 著 * 삶은 최전방이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삶이 너무 촘촘해서 삶에 질식할 것 같은 그 모든 격렬한 문장 속에서 목덜미를 풀어헤치고 나는 다만 노래 부르고 싶었을 뿐, 포효하고 싶었을 뿐, 아무리 소리쳐도 소리가 안 나 뻐끔뻐끔 담배나 피워대는 이 몸은 발암물질이다 불순분자다 근본 없는 혀다 버릇없는 어린아이다 나는 맹신하지 않았지 세상에 당연한 건 없으니까 이글거리는 나무 아래서 살갗이 타들어가는 슬픔 때문에 나는 무채색이다 뒤척이는 수면(睡眠)이다 아직은 고양이, 정복되지 않은 존재시다 * 우리는 피가 엉겨붙지 않는 거대한 혈족 같지 손가락이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꽉 끌어안고, 사랑은 말자 사랑해도 결혼은 말자 결혼해도 아이는 낳지 말자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아이는 무..

  • 사랑의 시차 최영미 著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 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面壁)한 두 세상.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著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著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자살 류시화 著 눈을 깜빡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