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와 나
이성미 著
오후와 함께 희미해졌어요 내가
조금씩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태양도 함께
다른 시간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도 함께
너를 희미하게 하려 했는데요 그러다가
오후 속으로 들어가 희미해졌어요 내가
너는 간절히 믿었겠죠 내가 없다고
나는 투명해졌어요 비로소 오후와 함께
의자에 얹힌 엉덩이와 의자가
의자의 다리와 나의 다리가
나의 얼굴과 그 옆이 뭉개집니다
너는 오후를 통과합니다 네가
오후 속에 앉아 있는 나를 통과합니다
나는 팔을 뻗어
너의 몸속 그늘진 내장에 손을 댑니다
너의 불투명한 몸이
더 투명하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네가 도시 끝을 향해 떠납니다 네가 멀어지면서
하얀 그물처럼 투명해질 때
물고기처럼 나는
천천히 오후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태양과 바람을 느끼는
불투명한 덩어리로 돌아왔습니다
네가 투명해지는 몸을 못 견디고 돌아왔을 때
오후도 나도 끝났어요
어느 세계로 가까이 갈지 결정하지 못하고 너는 다시 떠났어요
갑자기 오후가 끝났으므로
나는 너를 쉽게 잊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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