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 머리맡에 대하여

머리맡에 대하여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친척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 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 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 줄이 내려오고
금식 팻말이 나붙기도 했지요



          2


지게질을 할 만 하자/ 내 머리맡에서 온기를 거둬 가신 차가운 아버지/ 설암에 간경화로 원자력병원에 계실 때/ 맏손자를 안은 아내와 내가 당신의 머리맡에 서서/ 다음 주에 다시 올라올게요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와 서울역에 왔을 때/ 환자복에 슬리퍼를 끌고 어느새 따라 오셨나요/ 거기 장항선 개찰구에 당신이 서 계셨지요/ 방울 달린, 손자의 털모자를 사 들고/ 세상에서 가장 추운 발가락으로 서울역에 와 계셨지요/ 식구들 가운데 당신의 마음이 가장 차갑다고 이십 년도 넘게 식식거렸는데/ 얇은 환자복 밖으로 당신의 손발이 파랗게 얼어있었죠/ 그 얼어붙은 손발, 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그 다음 주에 와서/ , / 그, /그 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안절부절이란 절에 요양오신 몇 달 뒤/ 아, 새벽 전화는 무서워요/ 서둘러 달려가 당신의 손을 잡자/ 누군가 삼베옷으로 꽁꽁 여며놓은 뒤! 였지요



          3


이제 내가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물수건이 되고 기도가 되어야 하죠
벌써 하느님이 되신 추운 밤길들
알아요 이마와 정수리 시린 나날들이
남은 내 삶의 길이란 것을 말이에요
쓸쓸하다는 것은 내 머리맡에서
살얼음이 잡히기 시작한 거죠 그래요
진리는 내 머리 속이 아니라
내 머리맡에 있던 따뜻한 손길과 목소리란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에요 다음 주에 다음 달에
내년에 내 후년에 제 손길이 갈 거예요
전화 한 번 넣을게요 소포가 갈 거예요 택배로 갈 거예요
울먹이다가 링거 줄을 만나겠지요
금식 팻말이 나붙겠지요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기도소리가
내 머리맡에서 들려오겠지요 끝내는
머리맡 혼자 남아 제 온기만으로 서성거리다가
가랑비 만난 짚불처럼 잦아들겠지요
검은 무릎을 진창에 접겠지요



-
이정록 시집 <의자> 에 수록된 한편의 시.
다 읽으니 애매했던 모든 글자하나하나가 이해가 되며 가슴이 찡하게 쓰려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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